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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전용기로 방문 … 북 넘버2, 대통령 빼고 다 만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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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4일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왼쪽), 최용해 노동당 비서(왼쪽 셋째),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류길재 통일부 장관(뒷모습) 등 우리 측 대표단과의 면담을 마친 뒤 송도 오크우드호텔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황병서 총정치국장, 최용해·김양건 비서가 내일 폐막식에 오갔답니다.”

 3일 오전, 통일부 관계자는 귀를 의심했다. 아시안게임 참관차 인천에 머물러온 북한 김영훈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북한 실세’들의 방한 의사를 구두로 직접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실세들의 실명이 적시된 점, “갈까 하는데 어떤가”라는 식이 아니라 “가겠다”고 못 박은 점은 북한의 평소 스타일과 달리 파격적이었다. 북측의 대남 관계 총책인 김양건 비서야 자주 남측을 찾은 인물이지만 김정은에 이어 북한 권력 2인자인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지난해까지 권력서열 2위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던 최용해 당비서(3위)가 패키지로 온다는 건 메가톤급 뉴스였다.

 그는 서둘러 상부에 보고했다. 청와대는 긴급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어 숙의 끝에 북의 제안을 수용키로 했다. 정부가 오후에 이 사실을 북한에 알리자 북한은 “대표단이 내일 아침 항공기를 타고 서해 루트로 인천공항에 내릴 테니 차질 없이 맞이해 달라”고 통보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남측 인민이 사심 없이 응원했다”
4일 오전 9시, 평양에서 북한 대표단 11명을 실은 비행기가 출발했다. 같은 시각 남과 북이 이 사실을 동시에 공식 발표했다. 통일부 민병철 대변인은 “일단 우리 정부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북의 의도에 대해 예단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전했다. “긍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오전 10시10분, 비행기는 서해 직항로를 거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북한 국영항공사인 고려항공의 로고가 새겨져 있는, 김정은 국방위원장 전용기였다. 기종은 우크라이나 안티노프사가 2009년 상업 운항을 시작한 신형 중·단거리 여객기 AN-148. 김 위원장이 몇 달 전 구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격은 대당 2400만∼3000만 달러(약 254억∼318억원) 선이다. 김 위원장이 자신의 전용기를 내준 건 대표단에 힘을 실어 주고, 자신의 대화의지를 남측에 직접 전달하려는 뜻이 담긴 것으로 해석됐다. 추락사고를 우려해 기차만 탔던 아버지와 달리 항공기 탑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보낸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인천공항에선 통일부 김남식 차관이 이들을 영접했다.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군복을, 최용해·김양건 비서는 정장 차림이었다.

공식 오찬에 앞서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이들과 티타임을 마련했다. 인천시 송도 오크우드호텔에서 오전 11시5분 모습을 드러낸 최용해 비서에게 기자들이 “오늘 무슨 일 때문에 왔나”라고 묻자 “그걸 몰라서 묻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괜찮나”란 질문에 김양건 비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북한측 경호원 서너 명에게 둘러싸여 기자들의 접근이 불가능했다. 방한한 북한 인사 뒤에 이어폰을 낀 서구형 경호진이 도열한 건 처음이다. 이들은 김정은의 경호를 전담하는 호위총국 요원들로 전해졌다. 황병서의 신변보호를 위해 김정은이 자신의 경호인력을 직접 내준 것으로 해석됐다. 김정일 시대와는 달라진 북한 권부의 스타일이 또 하나 추가됐다.

 티타임은 호텔 37층 룸에서 오전 11시14분 시작됐다. 류 장관과 천해성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장, 한기범 국정원 1차장 등 남측 관계자 6명은 창가에 등을 대고 북측 인사들을 맞았다. 류 장관은 “우리 남북이 거리로 따지면 걸어서도 금방 올 수 있는 거린데, 오랜 시간 돌아오시게 돼서 더욱 반갑다”고 운을 뗐다. 이어 “북의 역도 엄윤철 선수는 몸무게의 3배를 넘게 들더라. 역도사상 드문 기록이다. 우리 민족의 저력을 지구 만방에 떨치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김양건 비서는 “불시에 오게 됐는데, 급히 관심 갖고 수고들 해 주신 데 대해 사의를 표한다”고 답했다. “우리 총정치국장이 오셨다”는 말도 두 차례 반복했다. 김 비서가 “축구는 북과 남이 독차지했다”고 말하자 류 장관이 “축구 결승전에서 공을 잡고 있는 비율은 남측이 높았지만 북측의 효율적인 공격이 매우 매서웠다. 북한이 대승적인 관점에서 여자가 이겼으니, 남자는 우리에게 양보한 게 아닐까 싶은…”이라고 말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최용해 비서 역시 “(남측) 인민들이 사심 없는 응원을 보내 우리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체육이 조국 통일을 위한 사업에서 가장 앞섰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티타임은 11시34분까지 20분간 이어졌다.

민감한 남북 현안 논의됐을 듯
북 대표단의 당초 일정은 낮 12시30분 선수단 방문, 오후 1시 오찬이었다. 하지만 의전·경호상의 문제로 선수단 방문은 연기됐고, 오찬도 1시50분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인천시청 부근의 한정식집 ‘영빈관’이었다..

 오찬의 남측 대표는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었다. 북 대표단이 도착하기 전 취재진이 “삐라를 북한에서 문제 제기 할 것 같은데”라고 묻자 김 실장은 “삐라는 민간 단체에서 하는 것이다. 우리 법 체계를 잘 이해시켜야 한다”고 답했다.

 오찬엔 남측에서 김 실장, 류길재 장관, 김규현 청와대 안보실 1차장 등 8명이 참석했고 북측은 7명이었다. 자리 배치는 서열에 맞게 김관진-황병서, 류길재-최용해, 김규현-김양건이 마주 보고 앉았다. 김 실장이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가을이 결실의 계절이다. 남북 관계도 아마 그 수확을 거두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러자 김양건 비서가 “이번 아시아경기대회는 우리 민족끼리 이룬 힘과 자랑을 온 세상에 시위했다”고 화답했다. 박근혜 정부 임기 내에 성과를 내기 바라는 남측과 ‘우리 민족끼리’를 강조하는 북측의 속내가 드러난 대목이었다. 김 실장의 인사에 황 총정치국장이 침묵을 지킨 건 자신을 남측의 ‘총리’급으로 여겨 하급인 김양건 비서에게 화답을 맡긴 것으로 분석됐다.

 이후 오찬은 1시간50분간 이어졌다. 통일부는 “2차 고위급 회담을 합의했을 뿐 구체적 현안을 언급하진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이나 5·24 조치 해제같이 남북이 서로 중시하는 현안들이 간접적으로라도 논의됐을 가능성은 있다고 대북 소식통은 관측했다.

 이날 나온 식사는 최고가인 7만5000원짜리 한정식. 활어회와 전복구이·랍스터·소갈비구이·옥돔구이·꽃게전골에 이어 후식으로 무화과·밀감·키위·멜론이 나왔다. 16명이 백세주 3~4병을 들며 몇 차례 건배사를 나눴다. 황 총정치국장은 술을 마시지 않음에도 분위기를 위해 백세주 술잔에 사이다를 담아 마셨다고 한다. 우리 측 인사들은 대부분 편하게 밥그릇을 비웠으나 북측 인사들은 황 총정치국장 외엔 절반도 안 먹고 숟가락을 놓았다고 이 식당의 조은영 실장이 전했다. 조 실장은 “가벼운 얘기를 나누며 웃음이 자주 터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며 “류 장관이 ‘한국에선 양주보다 소맥을 많이 마신다. 여자들도 그렇게 많이 마신다. 도수도 많이 낮아졌다’고 하자 다들 웃더라”고 말했다.

 남측이 “박 대통령을 만나고 싶으면 주선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북측은 빠듯한 일정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을 만나면 김정은의 건강이나 이산가족 상봉 등 껄끄러운 얘기를 피하기 힘들까 봐 거절한 것” “김정은의 친서가 없어 만나도 할 얘기가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이어 북 대표단은 선수촌을 방문한 뒤 폐막식이 열리는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을 찾았다. 정홍원 총리와 오후 6시48분부터 14분간 회동했다. 현직 총리가 북한 고위급 인사를 만난 건 2007년 11월 이후 7년여 만이다. 정 총리는 “우리 국민이 굉장히 박수를 많이 치고 손바닥이 닳도록 응원했는데 보람이 있어서 좋다”며 “앞으로 고위급 회담을 통해 피부로 느끼는 성과들이 도출되길 기대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황 총정치국장은 “축구는 아시아에서 (남북이) 완전히 됐다. 이 기세로 나아가면 세계에서 아마 패권지기가 되겠다”고 화답했다.

 북 대표단은 오후 7시5분부터 10분간 여야 의원 10명과 면담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김학용·김영우·홍일표 의원,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과 원혜영·유기홍·윤관석·임수경 의원, 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가 참석했다. 김무성 대표는 “우리(새누리당) 국회의원들 20명이 (결승에 진출한) 북한 측 여자축구팀을 응원했다”고 인사를 건넸다.

 이에 황 총정치국장은 “그래서 우리(북한팀)가 이겼나 보다”고 화답했다.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참가했던 임수경 의원은 10여 분간의 면담이 끝나고 북측 인사들과 별도로 인사를 나눴다. 북측 인사들이 임 의원을 알아보며 인사말을 건넨 것으로 전해졌다. 폐회식이 끝나자 북 대표단은 다시 한 번 정 총리와 비공개 대화를 나눈 뒤 오후 10시25분 인천공항에서 자신들이 타고 온 전용기로 돌아갔다. 꼭 12시간의 일정이었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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