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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개혁 막후서 총지휘 … 주석 3명 보좌 '살아있는 제갈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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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왕후닝(59)은 이제 더 큰 권력을 갖게 됐다. 외교정책에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중국에는 희소식이고 다른 나라에는 매우 나쁜 뉴스다.”

 왕후닝의 대학원 동문인 황징(黃靖) 국립 싱가포르대 교수의 말이다. 외교만이 아니다. 시진핑(習近平) 시대 중국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7인 회의보다 중앙전면심화개혁영도소조(이하 심개조)의 권력이 더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환골탈태(換骨奪胎) 중인 중국의 개혁을 총지휘해서다. 심개조는 기득권에서 자유로운 당 최고 싱크탱크인 중앙정책연구실에 설치됐다. 2002년부터 12년째 주임을 맡고 있는 왕후닝이 올 1월 22일 1차 회의를 한 심개조 비서장 겸 사무실 주임을 맡았다. 중국의 ‘뉴 노멀(new normal·새로운 표준)’이 그의 머릿속에서 그려진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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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후닝은 차근차근 권력의 사다리를 올랐다. 중국 공산당은 민주집중제를 따른다. 정치국 위원 25명은 매월 말 중난하이(中南海·중국의 최고 권부)에 모여 핵심 정책을 결정한다. 20일부터 나흘간 열리는 18기 4중전회(제18기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는 지난달 30일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결정한 ‘의법치국(依法治國·법에 따른 국가 통치)’ 방안을 8669만 당원의 위임을 받은 중앙위원회가 추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1995년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의 추천으로 상하이 푸단(復旦)대를 떠나 베이징 중앙정책연구실에 둥지를 튼 왕후닝은 2002년 16기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 당선됐다. 5년 후 17기 당대회에서 중앙서기처 서기직 마지막에 이름을 올렸다. 철저한 서열 조직인 중국 공산당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비서실장 격인 링지화(令計劃) 전 중앙판공청 주임에게 밀렸다. 2012년 그는 7명의 상무위원 뒤, 펑리위안(彭麗媛) 여사 바로 뒷자리를 꿰찼다. 리잔수(栗戰書) 중앙판공청 주임에 앞선다. 교수에서 정치가로 변신한 지 17년 만이다.

 왕후닝은 모순이자 신화다. 중난하이 정치를 파벌정치, 권력 투쟁으로 해석하는 중국 전문가들에게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시진핑까지 총서기 3명을 보좌한 왕후닝은 불가사의에 가깝다. 왕후닝은 중난하이에 ‘중국파’ 하나만 존재한다는 신화다.

 왕후닝은 책사(策士)다. 책사는 말이 없다. 주군(主君)의 언어로 말할 뿐이다. 정치국 위원은 당 기관지인 인민일보 사이트에 개인 페이지가 제공된다. 여기에 노출되는 동정은 중난하이를 읽는 암호다. 왕후닝의 개인 페이지에는 그의 발언이 전혀 없다. 시진핑 주석의 국내외 핵심 동정기사 마지막 줄의 수행원 명단에 이름이 실린 기사가 전부다. 총서기를 보좌하지 않은 행보는 공개되지 않는다.

 왕후닝은 ‘살아 있는 제갈량(諸葛亮)’이다. 그를 이해하기 가장 쉬운 비유다. 왕후닝은 장쩌민 주석을 위해 공산당은 선진 생산력(자본가), 선진 문화 발전(지식인), 광대한 인민(노동자·농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3개 대표론’을 만들었다. 후진타오 주석에게는 사람을 근본으로 하고(以人爲本), 전면적이고 협조적이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과학 발전관’과 ‘조화(和諧) 사회론’을 제공했다. 시진핑에게는 ‘중국의 꿈’을 선사했다. 나관중이 지은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제갈량은 위(魏)·촉(蜀)·오(吳) 정립(鼎立) 구도를 그렸다. 왕후닝은 미국을 향해 충돌하지 말고, 대항하지 않고, 상호 존중하자는 ‘신형대국관계’를 제시한다. 제갈량의 꿈은 천하통일이었다. 왕후닝의 꿈도 다르지 않다.

지난해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서니랜즈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장에 왕후닝 중앙정책연구실 주임(맨 오른쪽)이 시진핑 주석 옆에 앉았다. [중앙포토]

 은둔의 책사 왕후닝의 86년 논문이 최근 다시 공개됐다. 칭화(淸華)대 ‘신세기청년개혁연구회’가 운영하는 웨이신(微信·중국 모바일메신저) 매체 ‘혁언(革言)’을 통해서다. 86년 상하이 주간지 ‘세계경제도보’에 실린 ‘문혁 반성과 정치체제 개혁’이다. ‘세계경제도보’는 89년 천안문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실었다가 장쩌민 당시 상하이 서기에 의해 강제 폐간된 매체다. 이 글에서 왕후닝은 중국에서 ‘문혁’이 발생한 이유 7가지를 들었다. ▶공산당 내부의 민주제도 부재 ▶실권 없는 인민대표대회 ▶헌법 보장의 결핍 ▶독립된 사법체제의 부재 ▶수직적인 분권 시스템이 없는 점 ▶건전한 국가 공무원 제도 부재 ▶제도로 보장된 시민권 부재다. 28년이 지난 지금도 적지 않은 과제가 왕후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 논문은 이후 중국 정치학계를 풍미한 ‘신권위주의’의 사상적 맹아가 됐다.

 왕후닝은 신보수주의자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정치고문이자 공화당의 총설계사 칼 로브(64)와 헨리 키신저(91)를 합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시진핑의 캐치프레이즈인 ‘중국의 꿈’은 ‘미국의 꿈(American dream)’의 중국식 변용이다. 왕후닝은 정치국에서 유일한 미국 전문가다. 왕후닝은 87년 전문 이론서 『비교정치분석』을 썼다. 88년 방문교수로 미국을 찾았다. 6개월간 30개 도시 20개 대학을 찾아 정부·민간 전문가와 미국을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자신의 비교정치 이론을 미국에 적용한 작업이었다. 『미국은 미국을 반대한다』(91년)가 그 결과물이다. 왕후닝 출사표(出師表·제갈량이 위나라를 토벌하러 떠날 때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올린 글)의 원형을 이루는 책이다. 그는 미국을 잉여가치를 수탈하고 자본가 계급이 독재하는 나라로 격하하는 교조주의와 좌파 사조를 배격한다. 짧은 200년 역사의 미국이 금세기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게 된 ‘미국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다. 그는 2000년 역사의 중국이 근대에 쇠락한 ‘중국 현상’을 연구해 중국이 강성해지는 길을 찾는 것이 학자의 책임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경쟁자 미국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었다. 대신 현실의 미국과 관념의 미국은 서로 다르고, 사실상의 미국이 상상 속의 미국을 반대한다는 패러독스가 미국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정치체제이건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권력 교체”라며 미국의 권력 교체를 탐구했다. 후진타오·시진핑의 권력 교체가 성공한 데는 왕후닝의 역할이 컸다는 얘기다.

 왕후닝은 지난해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랜초미라지의 서니랜즈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넥타이를 푼 끝장대화를 막후에서 연출했다. 다음달 그는 베이징에서 북동쪽으로 60㎞ 떨어진 옌치후(雁棲湖) 호반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직후 제2의 미·중 끝장회담을 준비하고 있다. 양(陽)의 기운 가득한 서니랜즈에서 음(陰)의 호숫가로 무대를 바꿨다. 양과 음은 교차한다. 역(易)의 지혜다. 왕후닝은 중국이 미국을 대체하겠다는 자신의 꿈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왕후닝은 야심가다. 『정치적 인생』(95년)에서 그는 “누가 정치가인가? 죽음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갖고, 동서양 학문에 통달한 지식을 갖췄으며, 숭고한 덕행으로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는 인격을 갖추고, 높고 먼 곳을 내다보는 시야를 갖고, 백번 꺾여도 휘어지지 않는 의지를 갖고, 온갖 냇물을 다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은 도량과 대세를 파악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중국의 민주혁명은 걸출한 지도자 집단에 의지해야 한다. 바로 지금 이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미래다. 왕후닝은 아직 젊다. 시진핑 집권 2기를 열 19기 당대회가 열리는 2017년 62세다. 상무위원 진입이 가능하다. 시진핑이 6세대에게 권력을 물려줘야 하는 2022년에도 67세다. 상무위원 나이 제한 규정에 걸리지 않는다. 왕후닝의 몇몇 지인은 2012년 그가 발탁을 거절하고 막후 책사 역할을 고집했다고 말한다. 왕후닝이 책사에서 ‘걸출한 지도자 집단’의 주역으로 나설지 주목된다.

신경진 기자

[S BOX] 장펑 전 아나운서 “영원히 다 읽을 수 없는 한 권의 책 같은 사람”

“강단의 왕후닝은 언변이 화려하고 기개가 비범했다. 생활 속의 왕후닝은 넉넉하고 헐렁한 물 빠진 옷과 코듀로이 바지를 입은 채 길가 분식집에서 떡볶음 먹기와 헌책 노점상 구경을 좋아했다. 그는 학문에는 완벽을 추구하고, 생활에는 스스로를 즐겼다. 영원히 다 읽을 수 없는 한 권의 책 같은 사람. 그에게 일생의 꿈은 좋은 책 몇 권을 쓰고, 좋은 학생 몇 명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장펑(姜豊·44·사진) 전 중국중앙방송(CC-TV) 아나운서가 쓴 ‘왕후닝은 왕후닝을 반대한다’는 글의 일부다. 왕후닝의 저서 제목을 빌려 비범과 평범이 교차하는 스승에 대한 추억을 회고했다. 1993년 장펑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중국어 국제대학생변론대회에 푸단(復旦)대 팀원으로 출전했다. 왕후닝이 지도교수였다. 푸단대 팀의 우승 스토리는 『싱가포르설전(獅城舌戰)』으로 출판돼 60만 권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장펑은 왕후닝을 처음 만났던 기억을 “하루아침에 명장 아래 약졸이 된 기분”으로 묘사했다.

 장펑은 대회 이듬해 CC-TV에 입사해 PD·아나운서·기자로 활약하면서 산문·소설·시집을 내며 필명을 날린 재원(才媛)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이기도 한 장펑은 지난해 8월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서기의 재판에 프랑스 별장 관리인으로 증인석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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