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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슬픈 이스탄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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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주말, 채널을 돌리다 ‘꽃누나’들이 이스탄불을 걷는 장면을 보며 1년 전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날로 격화되는 민주화 시위 소식에 여행을 망설이기도 했었다. 12년 장기 집권 중이던 에르도안 총리는 이미 서구식 민주주의가 정착된 사회에 복고적인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우며 야간 주류 판매 금지, 낙태 금지, 공공장소 애정 표현 규제를 시도했다. 생각이 다른 세력을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했다. 여론 수렴 없이 도심의 마지막 공원을 밀어 쇼핑몰로 개발하려 하자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다. 15세 소년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고 시위대가 총에 맞아 숨졌다. 이후 총리 일족의 조(兆) 단위 부패가 인터넷을 통해 폭로되자 유튜브, 트위터를 규제했다.

 비행기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자전적 에세이 『이스탄불』을 읽었다. 뜻밖에도 파묵은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정서를 ‘비애’라고 했다. 오스만 제국의 몰락으로 인한 상실감, 서구에 대한 패배감이 그의 성장기에 터키 사회를 지배했던 것이다. 국부 아타튀르크는 탈이슬람 세속주의와 서구 지향 정책을 강행했지만 지방에서는 서구화된 도시 엘리트에 대한 거부감이 쌓여가고 있었다. 에르도안이 결국 올해 8월 대선에서 승리한 비밀도 거기에 있다. 서구에 대한 자존심 회복이라는 민족주의, 토건 중심의 경제성장에 대한 지방 빈민들의 지지.

 긴장한 여행객의 눈에 비친 이스탄불은 허무할 만큼 평화로웠다. 탁심 광장은 우리 명동과 비슷한 이스티클랄 거리 끝에 연결되어 있는데, 광장 주위의 경찰 병력이 무색할 만큼 사람들의 물결은 쇼핑과 맛집 거리 앞으로만 흘러넘쳤다. 한 구석에서 분노에 찬 청년들이 희생자 사진을 걸고 서명을 받고 있었지만, 관광객들만 잠시 기웃거릴 뿐 무심한 젊은이들의 시선은 연인에게로 뜨겁게 향해 있었다. 예쁜 디저트숍 2층에 앉아 앞 테이블의 여성 동성애자 커플이 서로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뽀뽀하는 것을 보다 보니 여기가 뉴욕인지, 파리인지, 이스탄불인지 알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흘러가는 화사한 젊은이들의 물결과 거리 공연 예술가들의 밝은 얼굴을 보고 있다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비장한 표정의 시위대가 아니라 저 청춘의 열기에 들뜬 젊은이들의 물결이 결국은 이 자유로운 사회를 종교적 원리주의로 되돌리려는 시대착오적 시도를 막아낼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세상에는 잠시 멈출 수는 있어도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흐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