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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도굴한 지석(誌石) 500여점 숨긴 박물관장 덜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도굴된 조선시대 지석(誌石) 558점을 개인 수장고에 보관해온 사립박물관장이 경찰에 적발됐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석 수백 점을 문화재 매매업자를 통해 사들여 수년간 보관한 혐의(문화재보호법상 취득ㆍ은닉)로 서울 종로구의 한 사립박물관장 권모(73)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28일 밝혔다. 또 지석 매매 알선 업자 조모(65)씨와 김모(64)씨도 함께 검거했다.

권씨는 지난 2003년 6∼8월 조씨와 김씨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3천300만원에 지석 379점을 사들이는 등 모두 558점의 지석을 최근까지 보관한 혐의를 받고있다. 경찰은 도난된 불교문화재가 경매 시장에 나왔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지난 6월 권씨의 수장고를 압수수색하다 지석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경찰 조사에서 권씨는 “지석이 장물인지 몰랐고 학술ㆍ연구 목적으로 보관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경찰은 “문화재 전문가인 권씨가 본래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지석이 도굴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밝혔다.

지석은 묘에 묻힌 사람의 이름과 생년월일, 조상 등을 기록해 무덤 옆에 함께 묻는 판석이다. 매장자의 일대기는 물론 당시 사회사가 기록돼 있어 역사 연구의 주요 자료로 활용된다. 경찰 조사 결과 권씨가 취득한 지석 가운데 379점은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풍산군 이종린 분묘 등에서 도굴된 것으로 나타났다. 풍산군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손자다. 무오사화를 주도한 유자광(1439∼1512)이 쓴 광산 김씨 김극뉴(1436∼1496)의 지석도 5점 회수됐다. 또 중종반정을 도운 공으로 정국공신에 오른 전의 이씨 이희옹(1472∼1541)은 이번에 회수된 지석 6점을 통해 처음으로 탄생 연도가 확인됐다.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1563∼1628)이 쓴 반남 박씨 박린(1547∼1625)의 지석 10점의 경우 17세기 초 지석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사료로 문화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경찰 관계자는 “문화재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오르기 때문에 도굴 문화재 대부분은 범죄의 공소시효가 완성된 후 유통되는 게 일반적”이라며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현금거래 방식으로 매매가 이뤄지는 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압수한 지석을 피해 문중에 돌려주고 주인을 찾지 못한 지석은 국립민속박물관 등에 보낼 예정이다.

고석승 기자 gokoh@joongang.co.kr

영상=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사진설명
1. 사각백자에 청화로 글씨를 새긴 조선개국공신 경주 김씨 계림군 김균(1341∼1398)의 지석
2. 각 면에 글씨를 새겨 넣은 한성부윤 원주 변씨 변진방의 지석
3. 승정원 승지 풍산 홍씨 홍만기(1650∼1713)의 지석
4. 원형의 백자에 글을 새긴 이조판서 풍양 조씨 조동면(1867∼1903)의 지석
5. 조동면의 지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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