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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출신 장·차관 0명, 대통합되겠나” … 도민들 부글부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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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호 07면

24일 전북도청에서 열린 국민대통합위원회 간담회에서 한광옥(왼쪽) 위원장이 전북 도민 20여 명으로부터 현 정부에 대한 쓴소리를 듣고 있다. 오른쪽은 송하진 전북지사. [뉴스1]

부슬비가 내리던 24일 낮 전북도청 중회의실.

국민대통합위 ‘전북 민심투어’ 동행 취재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역 소통 공감 릴레이’란 이름으로 전북 도민 20여 명을 초청해 연 간담회에서 정부에 대한 강도 높은 질타가 이어지면서다.

환영사를 하기로 했던 김광수 전북도의회 의장부터 “바로 쓴소리를 하겠다”며 운을 뗐다. “대통합의 핵심은 인사다. 박근혜 정부도 인사 탕평을 공약했다. 그래 놓고 정부 내 장·차관 중 전북 출신은 제로다. 인사에서부터 도민들의 상실감은 대단히 크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서늘한 발언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권순택 전북일보 편집국장=“김영삼(YS) 정권 때인 1994년 전북 출신은 장·차관에 한 명도 발탁되지 않았다. 20년 만에 다시 그렇게 됐다. 청와대 수석, 비서관도 없다. 암울한 시대다. 총리실 산하엔 새만금 사업을 논의하는 새만금위원회가 있다. 공동위원장이 총리인데 참석을 안 한다. 총리가 그러니 장관들도 참석을 안 한다. 한·중 경협 단지도 논의하지 못하고 맹탕 위원회밖에 안 된다.”

▶김정자 여성단체협의회장=“200만 도민 중에 장·차관이 하나 없는데 ‘너희, 대통합에 참여해’하면 되겠나. 지도자부터 갈등 요인을 해결해야 한다.”

▶하현수 상인연합회장=“한 위원장이 대선 때 와서 전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전통시장 영세 상인들이 다 어려운데 정말 어디 전화 한 통화 할 데도, 비벼볼 데도 없다.”

▶조상규 농민회 의장=“소외된 농민의 목소리가 중앙정부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내년 쌀 관세화가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다.”

이밖에 “새만금에서 포항을 잇는 고속도로, 새만금에서 김천을 잇는 철도가 뚫려야 하는데 막혀 있다” “일베라는 사이트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지역 감정) 이야기가 오가는데 국민 의식을 개선해야 하지 않느냐” 등등의 지적도 나왔다.

한광옥 위원장 건배사에 뼈있는 응수
인사 편중에 비판이 집중되자 한 위원장은 “이 고장(전주) 출신으로 송구스럽다”며 해명에 나섰다. “정권 초라 지역 안배가 안될 수 있다. 내가 김대중(DJ) 전 대통령 비서실장 할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현 정부 임기가) 3년 넘게 남았는데 인사 전체를 평가하기 이르다. 곧 해답을 반드시 올리겠다.”

자리를 옮겨 진행된 오찬 분위기도 썰렁했다. 한 위원장이 건배사로 “소, 화, 제, 소통과 화합이 제일이다”고 하자 송하진 전북지사가 “진, 통, 제, 진짜 소통이 제일이다”는 건배사로 맞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식사 중에도 뾰족한 소리는 이어졌다.

▶한 참석자=“그나마 안전행정부에 전북 출신 이경옥 차관이 있었는데 (세월호 참사 때) 나갔다.”

▶송 지사=“(한 위원장이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전주 출신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김 실장은 뭔가 부탁하거나 해결해줄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분위기를 살리려 김현장 대통합위 통합가치분과위원장이 “청와대 정무수석(조윤선)이 전북의 며느리”라고 웃음 섞인 이야기를 했지만 좌중에선 헛헛한 웃음만 나왔다. 식사가 끝나 일어서는 자리에서도 송기순 여성경제인협회장은 한 위원장을 향해 “전북 경제는 죽고 있다. 먹고살 게 없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다”고 쓴소리를 했다.

다음 날 지역 언론은 “전북은 장관도, 차관도, 청와대 수석도, 비서진도 없는 ‘4무(無)시대’”라고 꼬집었다.

대통령 직속 국민대통합위가 개최한 지역 간담회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7월 출범 후 강원·충북·경남·부산 등의 10개 시·도에서 열렸다. 하지만 “다른 지역보다 발언자도 많고 비판 강도도 거세 호남의 불만이 상당한 것 같다”는 게 대통합위 관계자의 말이다.

“화두 포괄적이라 빠른 성과 어려워”
대통합위는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이 ‘100% 대한민국 달성’을 공약하면서 만들어졌다. “사회에 내재한 상처와 갈등을 치유하고, 상생 문화를 정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정책과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취지였다. 이념·계층·지역·세대 갈등이 해결 과제다. 전주 출신으로 DJ 비서실장을 지낸 한 위원장이 수장을 맡은 것도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출범 후 1년2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눈에 보이는 실적은 미미하다는 지적이다. 지역 감정을 감안해 운전면허증 지역 표기 삭제를 제안해 올해 7월 이후 신규 발행 면허증부터 시행하도록 하고 병원 입원, 기업체 취업 지원 시 과도한 개인정보 수집 관행을 개선하도록 한 정도다.

이에 한 위원장이 지역을 순회하는 버스에 기자가 동승해 이 같은 시각에 대해 직접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대통합위의 지난 1년2개월에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면.
“70점 정도다. 노력만 보면 90점을 줄 수도 있겠지만 세월호 참사 후 활동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대통합위의 존재감이 없다는 지적인데.
“대통합이란 화두가 워낙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보니 성과가 빠르게 도출되지 않는다. 시골에 가면 구들장이 있다. 불을 때면 천천히 달궈지지만 방안의 온기를 유지해준다. 구들장처럼 점진적으로 성과가 나올 거다.”

-박 대통령에게 인사 탕평을 건의할 건가.
“간담회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보고서를 작성해 청와대로 보낸다. 정무수석이 간사 역할을 한다. 대통령에게 연락할 일은 있지만 한 건 한 건 갖고 대통령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향후 계획은.
“통합이란 단어는 형이상학적이다. 그걸 형이하학적으로 끌어내리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다.”

“자문기구론 한계 … 집행기구 돼야”
대통합위는 핵심 사업으로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는 슬로건으로 펼치는 ‘작은 실천 큰 보람 운동’을 내세운다. 폭력과 막말하지 않기, 존중과 배려하기처럼 작은 일을 실천하는 게 대통합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9·11 테러 후 펼친 ‘나는 미국인입니다’라는 국민 통합 운동이나 독일이 동·서독 갈등 해결을 위해 벌인 ‘당신이 괴테다, 당신이 베토벤이다’ 캠페인과 유사하다.

대통합위는 이외에 갈등 관리 전문가를 양성하고 통일 친화적 사회를 만들겠다는 내용 등을 담은 ‘국민대통합 종합계획’을 6월에 발표했다. ‘국민통합 의식조사’를 통해 국민이 이념 갈등과 지역 갈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느낀다는 점을 밝혔고, 파워엘리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념 인식조사’에서 진보나 보수 인사가 중시하는 이슈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했다. ‘국민통합지수’도 개발해 10월 중 발표할 예정이다. 조만간 서울·대전·부산·광주 권역별로 250명씩 총 1000명이 참여하는 국민대토론회를 열어 국가 미래 비전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정작 국론을 분열시키는 갈등 현안에 대해선 별 역할을 못했다는 평가다. 서울시로부터 중재 요청이 들어온 용산 화상경마장 문제는 물론이고 영남권 신공항, 밀양 송전탑 문제, 지역 편중 인사에 대해선 변변한 입장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도덕성 회복 운동, 안전 불감증 자성 운동 등을 펼쳤지만 정작 뜨거운 쟁점인 희생자 유가족이 제기하는 문제 등에 대해선 “정치권이 할 일”이라며 사실상 손을 놓았다.

대통합위 관계자는 “현재 위원회라는 조직은 만들어졌지만 조직 성격상 자문기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며 “앞으로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집행기구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위만 있을 뿐 실권이 없다는 얘기다.

전주=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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