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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경제사] 석탄과 기계가 낳은 산업재해 … 선진국이 고안한 해결책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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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호 20면

그림 1 19세기 초 영국에서 삽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토머스 롤런드슨이 그린 그림. 굴뚝 청소부들이 거리를 돌며 “굴뚝 뚫어”를 외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삽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토머스 롤런드슨(Thomas Rowlandson)의 작품이다. 그는 하층민의 생활상을 해학과 풍자를 곁들여 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등장인물들의 정체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힌트는 그림의 왼편 윗부분에 있다. 솔과 부삽을 든 채 굴뚝 위로 상체를 내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림 속의 주인공들은 바로 굴뚝청소부이다. 이들은 지금 거리를 돌아다니며 목소리를 맞추어 “뚫어!”를 외치는 중이다.

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⑭ 산업재해의 탄생

굴뚝을 정기적으로 청소해야 하는 이유는 연료로 석탄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런던의 경우 1666년 대화재로 1만3000여 채의 가옥이 잿더미가 된 후 벽돌을 주재료로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땔나무 대신에 석탄을 쓰는 가구가 크게 늘어났다. 속도가 더뎠을 뿐 다른 도시들에서도 석탄을 쓰는 가구가 점차 많아졌다. 석탄 연기가 잘 빠져나가게 하려면 굴뚝 내부를 좁게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몸집이 작은 아이에게 일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각 마을(교구)이 가난한 아이들에게 기술을 익힐 자리를 알선해주는 ‘교구도제’ 제도가 널리 퍼져 있었다. 돈 없고 기댈 곳 없는 빈민 아동은 굴뚝청소 도제로 받기에 딱 좋았다.

그림 2 어린이들이 굴뚝을 청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좁은 굴뚝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묘사했다.

굴뚝청소는 사고 위험이 큰 작업이었다. 아이들은 좁디좁은 굴뚝을 오르내리며 검댕을 떼어내고 가루를 쓸어담아 밖으로 끄집어냈는데, 공기가 통하지 않아 질식하기도 하고, 옷가지가 엉켜 목이 조이기도 했다. 굴뚝이 뜨거운 상태에서 작업하다 화상을 입기도 했고, 굴뚝이 약해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림 2에서 아이들의 노동여건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굴뚝청소 아이들은 사고뿐만이 아니라 직업병의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었다. 팔꿈치와 무릎에 난 상처가 감염되어 악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검댕과 늘 접촉하였던 탓에 각종 암의 발병도 많았다. 아이들은 더러운 주거환경, 휴식할 시간의 부족, 불량한 영양 상태 탓에 건강 악화를 피하기 어려웠다.

더욱 본격적으로 사고와 직업병의 문제가 불거진 것은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면서였다. 노동자들은 공장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장시간에 걸쳐 고된 일을 했다. 환기시설이 형편없고 조명이 불량한 공장 안에서 수많은 동력 기계와 공작 기계가 아무런 안전설비 없이 굉음을 내며 엄청난 속도로 돌아갔다. 순간의 실수로 손발이나 머리카락이 기계에 빨려들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히려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이상할 지경이었다.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면 공장의 경우 기계화가 진전되면서 남성의 근육보다 섬세한 여성의 손놀림, 기계 사이로 오가면서 끊어진 실을 잇는 아동의 민첩함이 필요했다. 여성과 아이들은 성인 남성에 비해 임금이 낮고 규율을 강제하기도 쉬웠다. 이들은 폐질환, 근골격계 질환, 감염성 질환에 시달렸는데, 모두 열악한 노동조건과 관계가 깊은 질병들이었다.

그림 3 광산사고로 혼란스런 현장을 묘사한 그림.

광산도 마찬가지였다. 석탄과 각종 광물을 캐기 위해 수많은 광부들이 칠흑같이 어둡고 비좁고 무덥고 습한 갱도 안에서 분진이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일했다. 채굴량이 증가하면서 갱도가 점점 깊고 복잡해지자,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더 많이 고용되었다. 당시 여성과 아동 광부들의 노동 실태를 조사한 의회보고서에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가득하다. 광부들은 석탄덩이 운반차량에 치이고, 무너지는 갱도 천정에 깔리고, 수직갱도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겪었다. 시력을 손상하기도 하고, 폭발사고로 인해 수백 명의 광부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림 3>석탄 분진을 호흡해 생긴 진폐증은 일을 그만둔 이후까지도 이들을 괴롭혔다.

석탄과 기계를 사용하기 이전에도 재해는 존재했다. 농장, 가내 수공업장, 마차와 배에서 재해는 끊임없이 발생해 왔다. 그러나 공업화는 재해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작업이 소수에 의해 이루어지던 시절에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작업의 성격과 잠재적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사고가 발생하면 개인의 잘못 혹은 운명의 소관이라고 여기곤 했다. 그런데 공장과 광산의 규모가 커지고 철도와 같은 운송수단이 도입되면서, 많은 사람의 작업이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고 작업 공간이 중첩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자신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타인의 잘못이나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재해를 입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것이 본격적인 ‘산업재해’가 탄생한 계기였다.

이제 업무상 발생한 사고와 직업병에 대해 과거처럼 노동자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워졌다. 대규모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과 사고방지에 대한 요구로 여론이 들끓었다. 예전에는 재해를 당한 노동자가 고용주의 개인적 선의와 자선단체의 빈민구호에 의지하거나 심지어 운이 없으면 아무런 실질적 도움을 받지 못하곤 했지만, 이제 고용주에게 정식으로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관념이 확산하였다. 법정에서의 판결도 점차 고용주의 책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19세기를 거치면서 결집력이 커진 노동조합에서는 돈 없는 피해자에게 소송에 필요한 비용과 정보를 제공하였다. 여러 정치가, 사회운동가, 종교 지도자들이 산업재해의 실상에 대한 실태조사를 하고, 안전장치의 의무화와 보상의 강화를 입법화하기에 힘썼다. 인기 소설가 찰스 디킨스와 같은 이는 대중 강연을 통해 이런 움직임에 힘을 보탰다.

산업재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노력은 공업화된 국가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출발이 늦었지만 철강·기계·화학·전기 등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급속한 공업화에 성공한 독일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노동자 수가 급증하면서 노동조합의 규모와 활동력이 증가하고 사회주의 운동이 대두하자, 비스마르크 총리는 1871년 고용주 보상책임법을 제정하고 이어서 1884년에 산재보험 제도를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산재정책을 폈다. 재해를 줄이고 피해구제를 보장하는 제도는 이렇듯 노동자의 과실 여부와 상관없이 재해의 책임을 개인으로부터 고용주 및 사회로 전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한편 영국은 자유방임주의와 개인적 자선의 전통이 강했던 탓에 공적 제도의 마련이 독일보다 늦었다. 영국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사고율이 가장 낮은 산재선진국이 된 것은 느리지만 지속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산업재해에 대한 독일식 대응체제는 곧 다른 국가들에게 전파되었다. 1910년까지 서구 20개국이 산재보험 제도를 갖추게 되었고, 일본·태국·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도 1940년 이전에 이 제도를 도입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쟁취하고 공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도 순차적으로 산업재해 관련 입법들을 정비하였다.

안전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특히 일생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의 안전이 행복의 필수조건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서구 산업사회는 공업화의 과정에서 수많은 산업재해를 입었던 경험을 교훈 삼아 내실 있는 대응책을 마련해 왔다. 오늘날에도 크고 작은 산업재해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일터에서 안전하게 일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제사회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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