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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자’ 임순례 감독 “황우석 사태를 모티브로 삼은 이유는…”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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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자’(10월 2일 개봉)는 임순례(54) 감독의 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2005년의 이른바 황우석 사태를 모티브로 삼아 사건의 핵심을 짚어내는 분석력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연출이 긴장과 재미를 고루 빚어낸다.

-워낙 논란이 컸던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는데.

“2012년 말에 영화사 수박의 신범수 대표가 연출을 제안했다. 그때 보여준 시나리오는 복잡한 사건을 압축하기만 한 것이어서 거절했다. 단, 이 영화만의 초점과 시각을 살려 시나리오를 다시 쓰면 괜찮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워낙 여러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사건 아닌가. 논문을 조작했던 과정, 황우석 열풍을 부추겼던 언론, 실체 없는 진실에 열광했던 한국 사회 등등.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2011, 김석윤 감독) ‘의뢰인’(2011, 손영성 감독)을 썼던 이춘형 작가가 시나리오를 완전히 다시 쓰면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언론인의 이야기로 윤곽이 잡혔다.”

-사건의 핵심을 꿰뚫는 키워드가 언론이라고 봤다는 얘기인가.

“그 사건의 여파가 그렇게까지 컸던 건, 줄기세포 복제에 성공했다는 거짓말에 속아 엄청난 세금이 그 연구와 사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국민들이 거짓된 진실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 거짓을 밝히는 것까지는 언론의 책임이다. 그 너머의 책임은 국민에게 있다. 거짓 보도에 현혹되지 말고 진짜 진실을 전하는 언론을 믿고 지지해야 한다.”

-왜 지금 이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나.

“그때나 지금이나 거짓을 진실처럼 보도하는 언론이 있고, 그걸 믿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 때문에 한국 사회가 점점 분열되고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논란의 사건을 모티브로 한 극영화를 연출한다는 게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이 영화를 통해 진실을 대하는 언론과 국민의 태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질 수 있다면, 그 부담을 껴안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 사건은 2005년의 일인데, 극 중 시대 배경은 모호하게 처리된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장면도 나오고.

“실제 사건을 재연하는 건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다. 거짓이 뿌리가 되어 여론을 호도하고, 몇몇 언론이 그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 하는 모습을 2014년 한국 사회에 대입해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사건의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고비마다 새로운 쟁점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연출이 인상적이다.

“준비 기간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시나리오를 여러 번 고쳤다. 실제 사건의 어떤 부분을 넣고 뺄까, 이런 저런 허구를 더하는 것이 실존 인물들에게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하는 문제에 신경을 가장 많이 썼다. 실제 사건 자체에 자극적인 요소가 정말 많다. 당시 황 박사 지지자들 중에는 논문 조작에 대한 취재를 그만하라며 분신?음독한 사람들도 있고, 자신들의 난자를 제공하겠다고 나선 여성들이 황 박사 연구실 건물에 진달래꽃을 뿌리며 시위를 한 적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흥미를 끌 수 는 있겠지만, 영화 전체의 분위기나 주제에 맞지 않겠다고 판단해 제외시켰다.”

-실제 사건과 가장 다른 부분이라면.

“실제 제보자의 부인이 황우석 박사 연구팀에서 일했던 건 맞는데, 영화와 달리 희귀병을 앓는 딸은 없다. 그분들의 양해를 얻어 각색한 부분이다. 극 중 제보자 심민호의 부인(류현경)이 복제 줄기세포를 손에 넣는 과정도 실제와 다르다. 실제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걸 주운 것이었다.”

-논문 조작을 추적하는 방송사 PD 윤민철(박해일)은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했나.

“기본적으로 언론인으로서 직업 정신이 투철한 인물이라고 봤다. 취재를 하거나 방송사 상사들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요령도 부릴 줄 알고.”

-윤민철과 제보자 심민호(유연석)는 물론 논문 조작사건의 핵심인물 이장환 박사(이경영)에 대해서도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황우석 박사가 황우석 사태의 유일한 책임자는 아니다. 학계·언론계·정치계·국민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 어떤 등장인물도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그리지 말자는 게 감독으로서 내 신조이기도 하고. 열차에 올라탔는데, 그 열차가 너무 무서운 속도로 달리자 거기서 도저히 뛰어내릴 수 없게 된 상태. 황 박사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이장환 박사의 연구팀이었던 심민호의 제보가 진실을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데.

“공익 제보라는 게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이 영화를 준비하며 알아보니 공익 제보자 대다수가 이후 아주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 제보를 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잘리고, 가정 경제가 파탄 나고,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에 정상적으로 복귀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개인적 삶까지 피폐해지는 거다. 가장 건강한 시민 의식을 지닌 사람들인데. 황우석 사태의 제보자 역시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다행히 지금은 새 직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영화가 언론의 역할을 되새기게 하는 동시에 공익 제보의 의미를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

-빠르고 치밀한 전개가 계속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한다.

“워낙 무겁고 진지한 사건을 다룬 이야기라, 상업영화로서 어떻게 관객을 만족시켜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우선 이야기가 빨리 달려야 분위기가 처지지 않을 것 같았다. 또 윤민철 PD의 직장 동료들인 조연출 김이슬(송하윤), 팀장 이성호(박원상), 김 국장(권해효) 등을 비교적 밝고 재미있게 그리는 것으로 극의 무거운 분위기를 상쇄하려 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이후 13년 만에 박해일과 다시 만났는데.

“박해일씨의 영화 데뷔작인데, 주인공 네 명 중 성우(이얼)의 고교 시절을 연기한 아역이었다. 해일씨가 스물네 살이었고, 나머지 아역은 전부 10대였다. 다른 아역들이 악기 연습을 빼먹고 놀러 다니기도 한 모양인데, 해일씨가 무슨 반장처럼 잘 통솔해 연습을 못 빠지게 하더라(웃음). 이후 해일씨가 배우로 승승장구 하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최종병기 활’(2011, 김한민 감독) 같은 상업영화와 ‘짐승의 끝’(2011, 조성희 감독) 같은 독립영화, ‘경주’(2014, 장률 감독) 같은 작가영화에도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보면서 작품 고르는 눈이 남다른 배우라고 생각했다. ‘제보자’로 다시 만나보니 그 사이 알찬 배우가 됐더라. ‘와이키키 브라더스’ 때만 해도 어린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동료로 느껴진다. 역할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진중하다.”

-마지막 장면은 좀 아쉽다. 한 인물에 기대지 않고 언론과 대중에게 고루 질문을 던지던 영화가 그 모든 공로를 윤민철 한 사람에게 돌리는 느낌이다.

“원래 생각한 결말은 재판을 받게 된 이장환 박사가 여전히 사람들을 현혹하는 말로 열변을 토하고, 윤민철이 그 지지자들의 원망스러운 눈빛을 받으며 법원을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진실이 밝혀졌는데도 그걸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실제로 이 장면을 찍기도 했다. 한데 후반 작업 단계에서 관객 반응을 미리 살피는 모니터 시사 결과를 보니, 관객들은 마지막에 사건이 어떻게든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 같더라. 그래서 지금의 결말을 다시 찍었다. 감독으로선 아쉬운 부분이다. 본래 취지와 상업성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는 상업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계속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매거진M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일간스포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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