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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개비·고동·거북손·홍합·청각 … 갯바위에 찬거리 널려 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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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바다는 깊다. 깊어서 검다. 이 검푸른 바다 아래에 삼치·감성돔·고등어·갈치 등 숱한 생선이 살고 있다. 절벽 끝의 거문도 등대가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여행기자가 거문도에 들어가는 계절은 봄이다. 거문도 등대로 가는 오솔길에 동백꽃 터널이 빚어지는 계절이어서다. 관광객은 물론 여름에 간다. 딱히 내세울 게 없는 계절이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 관광산업은 아직도 여름 한철 장사로 먹고 산다. 맛여행을 떠난다면 가을과 겨울이 제격이다. 파도가 높은 게 흠이지만 대신 입이 즐겁다.

삼치 맛이 제일 오르는 계절이 겨울이다. 가을은 어종이 풍부하다. 여름 끝자락과 겨울 들머리의 바다가 섞여 있다. 한 밥상(또는 술상)에 여름 갈치와 겨울 삼치가 함께 올라온다.

week&이 거문도를 갔다온 건 지난 13∼15일이었다. 한창훈의 열렬 독자 12명이 13∼14일 거문도 문학기행을 떠났는데, 그들과 일정의 절반을 공유했다.

참가자들은 대형서점 이벤트에서 누가 더 한창훈의 애독자인가를 밝혀 3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었단다. 무덤덤한 성격에다 낯을 가리는 작가가 선선히 거문도 맛여행 가이드를 나선 까닭이다. 우선 일러둘 게 있다. 아래에서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간다』는 ‘밥상’으로, 『술상 위의 자산어보』는 ‘술상’으로 줄여 부른다.

삼치, 어디까지 먹어봤니?

거문도 삼치

13일 오후 4시쯤 거문도에 도착했다. 하늘은 파랬지만 파도가 높았다. 3m가 넘는 파도에 승객 대부분이 멀미를 앓았다. 여느 거문도 단체관광처럼 거문도에 내리면 바로 백도 유람선을 갈아탈 계획이었지만, 파도 때문에 유람선이 뜨지 못했다. 대신 거문도 등대를 걸어서 갔다 왔다. 일행이 거문도 등대를 다녀오는 두어 시간 거문도항의 거문식당횟집에서는 밥상(또는 술상) 준비로 부산했다.

한창훈이 ‘술상’에서 수시로 밥을 얻어먹는다고 소개한 후배 식당이 거문식당횟집이다. 김종복(46)·최형란(46) 부부가 하는 작은 식당인데, 부부 모두가 작가의 후배이자 술동무다. 이날 저녁상의 주인공은 물론 삼치였다. 일곱자(70㎝)는 족히 넘는 삼치 5마리가 모두 소비됐다. 기대보다 큰 삼치에 놀라는 눈치를 보이자 최형란씨의 강의가 이어졌다.

“요만 한 거 보고 크다면 안 되지. 겨울이면 1m 넘는 것도 올라오는데. 뭍에서는 손바닥만 한 걸 구워 먹지요? 우린 그딴 건 삼치라고 안 불러요. ‘고시’라고 하지. 크기도 다르지만 맛도 달라요. 삼치는 연중 잡히지만 겨울에 제일 맛있어요. 크기도 크고, 살도 딴딴해요.”

회로 변신한 삼치. 살이 부드럽다.

삼치회를 뭍에서 먹기 힘든 이유는 삼치가 금세 상하기 때문이다. 회 뜨는 것도 쉽지 않다. 워낙 살이 부드러워 조금만 거칠게 다뤄도 살이 뭉개진다. 하여 삼치회는 뭉텅뭉텅 크게 자른다.

먹는 방법도 따로 있다. 양념 간장에 찍은 삼칫살을 양념하지 않은 김에 싸 먹는다. 묵은 김치에 싸 먹어도 좋다. 회를 뜨고 남은 대가리와 뼈는 탕보다 조림을 한다. 조림치고는 물을 넉넉히 잡는다.

드디어 상이 차려졌다. 회로 먹는 삼치는 입에서 녹았다. 높은 등급의 한우 육회 또는 냉장 참치의 맛이 떠올랐다. 삼치회 한 점에 소주 한 잔, 밥상(아니 술상)의 규율을 엄격했다. 이번엔 남편 김종복씨의 강의가 시작됐다.

“거문도 생선 하면 삼치지요. 갈치는 먼 바다에서 잡지만 삼치는 가까운 바다에서 잡지요. 먼 바다까지 나가야 하니까 갈치 배는 커야 합니다. 거문도에도 7척밖에 없어요. 대신 삼치 배는 많아요. 너도 나도 삼치로 먹고 살지요. 삼치 배가 들어오면 섬 전체가 술렁거려요.”

밤이 깊었다. 밤하늘에 반달이 걸려 있었다. 반달이어도 날이 맑아 환했다. 대신 바다는 깜깜했다. 파도가 높아 갈치 배가 못 나갔다는 뜻이었다. 이튿날 아침 어판장은 열리지 않을 터였다.

바다에서 먹고 사는 법

거문도는 동도와 서도, 고도 등 큰 섬 3개로 이루어져 있다. 거문도항·여객선터미널 등 주요 시설 대부분이 고도에 몰려있다. 한창훈은 동도 해안가(해발고도 1m)의 외딴 집에서 5년째 혼자 살고 있다. ‘술상’에 따르면 이 외딴 집은 귀신이 여러 차례 출몰한 바 있으나 작가가 들어간 뒤 종적을 감췄다.

이른 아침 한창훈의 집 앞에 모였다. 어판장이 안 열렸으니, 갯바위에서 갯것을 잡기로 했다. 아침에 모인 건 물때 때문이었다. 물이 빠지자 갯바위가 훤히 드러났다. 갯바위 위에는 온갖 갯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따개비·고동·거북손·삿갓조개·참가사리·홍합·청각 등 한창훈이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죄 갯것이라 뭉뚱그려질 것들이었다. 멍게처럼 선홍빛을 띤 해조류의 이름을 물었더니 의외로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산어보』 원문을 보면 해석이 안 되는 한자가 이따금 나온다. 대표적인 게 ‘묵을(墨乙)’이라는 단어다. 우리 말로 ‘먹을 것’에서 음을 빌려 적었으니 해석이 안 되는 게지. 생각해 봐라. 평생 비린내 모르고 살던 서울 양반이 섬으로 유배 왔으니 생전 처음 본 게 한두 개이었겠나? 『자산어보』를 보면 ‘창대’라는 섬 사람이 도움을 줬다고 나온다. 손암이 물었겠지. “이게 뭐냐?” 그럼, 창대가 “묵는 건디요”라고 대답했겠지. 바다에선 먹을 수 있는 것만 이름을 안다.”

한창훈이 갯바위에 붙은 삿갓조개에 칼을 들이댔다. “이 녀석은 방심하고 있을 때를 노려야 한다.” 삿갓조개를 건드리자 온 힘을 다해 바위에 찰싹 들러붙었다. 빈틈이 없어 아무리 힘을 줘도 꼼짝하지 않았다. 이번엔 작가의 말처럼 방심한 녀석을 골라 갑자기 칼끝을 밀어넣었다. 그제야 조개가 바위에서 떨어졌다. 갯것은 갯것 나름의 방법으로 거친 바다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했던 것이고, 사람은 갯것의 방법에서 사람 나름의 방법을 배워 막막한 바다에서 먹고 사는 방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한창훈이 칼로 떼어낸 삿갓조개를 바닷물에 헹군 뒤 맛을 보여줬다. 쫀득거리는 맛이 조개가 아니라 소라 같았다. 입안에서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거북손은 맛보지 못했다. 지천으로 널려 있었지만, 생긴 건 흉해도 맛은 으뜸이라고 손암과 한창훈이 입을 모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거북손은 손질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 삶아야 했다.

“내가 왜 갯것을 안 해먹는 줄 아냐? 귀찮아서 그렇다. 이 쬐만한 거 먹는데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차라리 생선 손질이 낫다.”

1 서도 보로봉은 거문도 전경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동도와 고도, 서도 등 섬 3개가 둥글
게 모여 거문도를 이룬다. 2 바다에서 잡은 것을 정리하는 어부의 모습. 돈 되는 것은 별로 없고 홍
새우만 잔뜩 잡았다. 3 바다낚시 나온 한창훈. 채비를 점검하는 동작이 꽤 노련해 보인다.

자랑해도 되는 맛

결론적으로 말해 이번 여행은 실패였다. 스스로 생계형 낚시꾼이라 소개하는 섬 토박이 작가와 사흘 내내 낚시를 시도했지만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섬에서는 이런 참담한 처지를 ‘똥깡구’라 부른단다.

똥깡구가 된 데는 바다 탓이 컸다. 애초에는 갈치 배 떠 있는 밤바다에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거문도 밤바다는 이틀 내내 칠흑같이 깜깜했다. 거문도 내해의 가두리 양식장 낚시좌대에도 갔지만, 그 흔하다는 전갱이 구경도 못했다. 2.5m 높이의 파도를 헤치고 감성돔 포인트라는 소원도에 나갔을 때는 바닷물만 뒤집어 쓰고 돌아왔다. 감성돔에 실패하면 저녁에 다시 내해로 나가 붕장어를 노리기로 했던 최후의 계획도, 소원도에서 하도 시달려 포기했다. 바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낚시꾼의 무용담은 부풀어 올랐다.

작가의 또 다른 술동무 김영권(51)씨가 10년 전에 1m가 넘는 참돔을 잡았던 기억을 꺼냈다. “힘이 엄청났어. 그놈이 몸을 휙 트니까 배가 돌아갔다니까.”

한창훈이 이내 받아쳤다. “그놈 3마리만 훈련해서 동력으로 쓰면 되겄네.” 작가는 이태 전에 어선을 장만했다. 배 없는 설움을 견디지 못해 큰맘 먹고 1.4t급 중고 어선 한 척을 샀는데, 자동차로 말하면 경차 정도란다.

여행 마지막 날은 작가와 함께 여수로 나와 어시장을 둘러봤다. 여객선터미널 건너편이 수산시장이었다. 좌판에는 삼치·갈치가 많았고, 수족관에서는 놀래미·농어·참돔 따위가 보였다. 며칠 날씨가 안 좋아 좌판의 갈치도 물이 안 좋았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갈치는 청동색으로 반짝인다는데, 좌판의 갈치는 은빛 비늘도 바래 있었다.

여수 수산물 특화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량진 수산시장처럼 횟감을 뜨면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구조였다. 한창훈이 거문도 앞바다 초도 출신의 시인이 하는 횟집 ‘거북수산’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갯장어 6마리와 농어를 회 떴다.

갯장어는 여름 보양식으로 유명한 녀석이다. 우리는 여름에 주로 먹지만, 일본에서는 가을에 주로 먹는다. 일본어 ‘하모’로 통하는데 ‘아나고’로 불리는 붕장어보다 두 배 이상 비싸다. 두 놈은 생김새로 구분한다. 갯장어 대가리 앞이 밋밋하다. 자세히 보면 돼지 코처럼 납작하다. 올 여름에 못 먹은 하모를 가을 여수에서 먹었다. 고소하고 담백했다. 한창훈 식으로 말해서, 먹어봤다고 자랑해도 되는 맛이었다.

한창훈의 재산목록 1호 1.4t급 어선 동성호.

●여행정보=여수 여객터미널에서 하루 두 번 거문도행 배가 뜬다. 오전 7시40분과 오후 1시40분 출발한다. 거문도에서는 오전 10시30분과 오후 4시30분 여수행 배가 출발한다. 뱃길로 약 2시간30분 거리다. 뱃삯 편도 어른 3만6100원, 어린이 1만8800원. 오션호프해운(오션호프해운.kr) 061-662-1144. 9월 중순 거문도 수협의 삼치 1㎏ 입찰가격은 5000원 정도였다. 겨울이 되면 1만원 가까이로 올라간다. 현지 소비자 가격은 입찰가격에 2000원쯤 더 붙는다.

바다낚시는 배를 타고 거문도 외곽의 포인트로 나가거나 가두리 양식장 낚시좌대에서 할 수 있다. 청심호 선장 김영권(010-3611-0761)씨가 어종별 낚시 포인트까지 실어다 준다. 1인 3만원. 낚시좌대를 이용하려면 김이환(010-4627-6242)씨에게 연락해야 한다. 1인 2만원. 낚시 채비는 직접 해야 한다. 거문식당횟집 삼치회(소) 3만원. 061-665-2203. 여수 거북수산 갯장어 1㎏ 3만원. 061-663-8588

글=손민호·홍지연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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