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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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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박용석]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은 자괴감이 섞였으나마 1980년대에나 가질 수 있었다. 맞설 명시적 적은 사라지고 심지어는 소비 사회에서 길러진 자신의 욕망이 내부의 적이 된 상황에서 욕할 만한 절대악도 없다. “자신의 적은 자신이다”는 소문이 내면의 주술문이 되어버렸다. 외부에 대한 공격성이 내부로 향하면 자살이 되듯이, 분노는 표출구와 방향을 잃고 분열증에 빠진다. 김사과는 분열증을 멀찍이서 팔짱 끼고 바라볼 수 없다. 자신 역시 분열증에 빠진 것처럼 욕설과 광기를 작품 곳곳에서 반복한다. 반복은 곧 무의식의 존재 방식이다. 억압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반복은 계속된다. 이처럼 김사과 소설이 추구하는 공감이란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내포 화자나 인물이 현실의 청년들처럼 철저히 미쳐가는 데서 비롯한다. 즉, 소설쓰기를 넘어 ‘소설되기’에 이른다. 다 정상이 아니다, 나부터도 정상이 아니라며 자신이 현실의 징후가 되어버린다. 소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답변이다. 그렇다면 김사과는 어떻게 살아왔나?

  1. 동물의 순수한 세계

 나를 둘러싼 세계를 다 때려 부수고 시작하겠다는 과격함과 ‘이게 사람 사는 건가?’ 하는 허탈과 분노에서 김사과의 소설은 시작된다. 집에 들어가면 경제적 무능자라는 자기 비하에 빠진 아버지가 술에 취해 욕설을 퍼붓고(‘영이’) 학교 나가면 경쟁 체제에 완전히 포획된 아이들의 폭력적 확신과 절망이 가득하다(‘미나’). 엄마 아빠가 죽고 없다면?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대학 등록금을 벌다 절망하고 부양해야할 병치레를 해주어야 할 조부모가 버티고 있다(‘정오의 산책’). 유년이나 학창 시절이나 성인기 모두 폭력과 절망에 저당잡힌 인생이다. 도시의 수많은 집들에 내가 들어갈 창 하나 없고 연애는 시도조차 못한다. 성욕은 자폐적이며 각자의 나르시시즘을 변태적으로 충족시킬 뿐이다. 뭣도 모르고 화려한 외양을 믿고 찾아온 청년 이방인들은 어떤가? ‘조선족’ 여자는 고급 매음굴에서 거래되고 런던의 빈민 출신인 불법체류자는 마약에 취한 채 죽어간다(『테러의 시』). 내부자건 이방인이건 청춘들이 이렇게 ‘개처럼’ 살고 있다는 인식은 김사과의 소설을 관통한다.

  우리가 동물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선언은 이 세계를 알레고리나 비유 없이 보여주며 실천된다. 그러나 인간은 소파에 앉아 TV 화면 속 동물의 폭력과 살육을 동요 없이 감상할 수는 없다. 김사과는 욕설을 퍼붓고 폭력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독자를 동요시킨다. 소파에 앉아 구경만 하지 마라, 내 문학은 소설을 읽는 이들이 같이 욕을 듣고 미치고 고통에 빠지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일종의 충격 요법으로서의 문학이다. 문학이 하나의 유희나 위로를 비롯한 감정 소비품이 되기 쉬운 시대에 매끄러운 구성이나 인물의 내면을 장악한 안정된 화자를 거부하고 내포적 화자는 무의식의 분열을 드러내며 자신이 동물 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김사과 소설의 윤리성이란 ‘청년 실업을 보도하는 기자는 적어도 취업자 아니냐’ 혹은 80년대식으로 말하면 ‘노동자 아닌 지식인이 노동시를 쓸 수 있는가?’하는 의구심을 의식하는 성찰 능력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동물은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는가?

 2. 사랑, 테러와 초월의 변증법

 폭력과 시뮬라크르의 세계 속에서 그들은 『풀이 눕는다』의 연인처럼 사랑에 빠진 자만이 테러와 초월의 욕망을 이기고 진짜 초월에 이를 수 있다. 그들은 사랑은 ‘살아 있다는 걸 뜻’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지금 이 순간만을 바라보겠다는 약속’이라고 믿으며 절대적 사랑을 완성하려 한다.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 아름답게. 그게 내 꿈’이라며 소비 체제에 맞선다. 화가 풀과 소설가 ‘나’가 원한 것은 모든 것이 상품화에 포획되며 교환 가치 축적을 위한 경쟁이 가속화되는 세계 속에서, 낭만주의자들이 구원의 계기로 삼았던 예술과 사랑과 아름다움이다. 낭만주의의 혁명성을 고려할 때 가난을 감수하는 예술가의 사랑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체제의 완고함을 깨고 나와 자족적 체제를 가능케 한다.

 물론 그들의 사랑은 실패할 운명이다. 체제의 공모자가 보기에 ‘나’의 가난과 고생도 소설을 쓰기 위한 것이었고 예술적 도발조차 상품화될 때만이 가치를 갖는다. 교환 가치를 갖지 못한 예술가인 그들에게 닥친 궁핍은 이 시대에 예술과 사랑의 불가능성을 증명할 뿐이다. 실패당한 진실을 기억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겠지만 내부 혁명적 사랑의 기억은 적어도 체제의 공모자가 되는 것을 막는다. 풀은 잠시 바람에 누울 수 있지만 곧 일어날 것이고 봄이 되면 소생할 것이다.

 『풀이 눕는다』는 여타 작품과는 다르게 소설가인 ‘나’를 앞 세워 자전성을 강조한다. 작품 내 음악을 각주를 달아 가수와 작품 이름을 친절하게 알린다. ‘이 작품의 ‘나’는 곧 소설가 나’라며 텍스트성 무의식을 보여준 셈이다. ‘나’를 숨기며 분노의 정념을 마음껏 발산한 감정상의 ‘소설되기’ 뿐만 아니라 ‘나’를 드러내면서 화자 차원의 ‘소설되기’가 실천되는 것이다. 이 작품이 주는 위태로움 섞인 공감은 김사과-소설 속의 ‘나’인 소설가-청년 독자 셋이 분리되지 않은 데서 비롯한다. 공감의 확보에서 사랑의 영역을 놓칠 수는 없다. 김사과는 자신을 드러내며 사랑의 전면전을 실천하면서 사랑의 불가능성을 내면화한 청년 독자에게까지 ‘소설되기’를 제안한다. 일종의 공동 시위다.

 3. 순응자의 세계와 그 너머

 그러나 체제 순응자에게 사랑은 단지 육체의 쾌락이나 섹스중독의 외피일 뿐이다. 예술 역시 냉소로 찬 미적 상품으로 타락한다. 예술의 상품화 수준을 넘어 자본주의가 전위주의조차 포획하여 혁명이나 정치적 급진주의조차 상품화하는, ‘모든 것의 상품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현실에서 예술로써 혁명을 꿈꾸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사랑과 예술이 체제의 억압을 견디고 나아가 전복할 힘을 잃어버린 현실은 환멸의 세계다. 모든 것은 게임과 유희와 공학이 된다. 남은 것은 생기 잃은, 그래서 생물적 생기가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인공의 삶이다. 체제의 현실원칙에 따르는 대신 신경쇠약(신경증)에 걸린 자에게 남은 것은 ‘여름을 기원함’에서처럼 생물학적 건강함이다. 가장 잔인하고 완벽한 살인자인 시간에 대한 공포는 유한한 인간 모두에게 해당하기 때문에 체제에 억눌러 압사당한 자들의 공포에 비하면 퇴폐적이기까지 하다. 이 퇴폐적 탐미주의는 영원히 어린 아이로 남고 싶은 퇴행심리와 다르지 않다. 보수주의의 생물학적 기원이다. 혁명은 대학의 공론장에 얌전하게 포섭되고 강단의 혁명론은 영어로 질문하는 명문대생의 지적 사치 도구와 권태에 빠진 계층의 자극제로 기능한다. 상징질서에 진입하지 못한 청년은 그 절망을 체제의 변화가 아닌 타자 배제와 국가라는 대타자에 예속됨으로 해소하려한다. 그것은 “허약함의 징표”로서 심리적 보수화의 기원이자 환멸의 완성이다.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청년이 무기력을 넘어 체제에 복속해버렸다면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남은 것은 도착된 혁명 구호와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완전한 무기력이다. ‘항상 오고 싶었던’ 이 천국이 바로 지옥 같은 ‘여기’(『천국에서』)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지옥 같은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체제에 적응하거나 그것을 내면화해버린 자들을 겪으며 ‘경희’는 자신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간다. 체제의 수족관 안에 살고 있다는 것, 그 안의 평화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에서 경희는 수족관은 자신의 내부에 지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김사과의 ‘소설되기’는 이제 『천국에서』에 이르러 현실성을 띤 느낌이다. 그는 이 지점에서 중산층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실천 방식을 묻는다. 자신이 이미 체제 내부에 있는 순응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채, 분노의 정념을 노출하여 한 번의 기분풀이나 자기 파괴로 끝나기보다는 체제 내부에서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소설되기’의 양심적이고 현실적 실천이다.

  현실을 알레고리나 비유로 암시만 해주어도 작품의 현실성을 담보할 수 있었던 시절은 소설가에게 행복한 시대였다. 보편의 대의가 철 지나 보이는 시대에 소설가가 그릴 수 있는 현실이란 세밀한 묘사화나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며 두루뭉술한 관념으로 그린 스케치다. 아예 현실 얘기는 하지 않겠다고 쿨하게 선언하면 솔직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참에 김사과는 가정과 학교와 대학과 직장과 예술가의 세계 등을 무대로 고집스럽게 현실 얘기를 해왔다. 현장을 날것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밀화이기도 하고 부정 정신이나 혁명을 거론한다는 점에서 스케치이기도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을 말하고 싶은 그가 현실과 긴밀한 연관을 맺게 되는 지점은 ‘소설되기’를 통해서였다. 관찰자에서 참여자로, 정념 유발자에서 정념 발산자로 그는 소설 ‘쓰기’를 ‘되기’로 바꾼다. 소설 속의 삶과 작가의 의식과 정념을 일치시키겠다는 의지는 소설과 현실이 기실 별 상관없는 것처럼 되었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그는 자신이 소설속의 절망적 감정 상태가 되어버림으로써 배수진을 친다. 그 자체가 현실의 징후가 되어 소설과 현실의 연관에 진정성을 부여한다. 절제된 묘사와 완결된 구성미를 포기하며 김사과라는 일관된 정념의 화신을 무대에 올려 보낸다. 그리고는 청년 세대의 위안자가 아닌 분신의 영매가 되어 청년들의 대리인으로서 씻김굿을 벌인다.

 김사과 작품 속 청년들은 점차 나이를 먹어 가정을 이루며 생활인이 되어갈 것이다. 그러나 김사과는 그들이 요즘 식으로 ‘강남좌파’로 물러나거나 체계의 거대함에 겁먹고 한번 저항해 본 자의 변명거리를 지닌 채 철저히 체제에 순응하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징후가 보인 대로 부정 정신의 에너지에다 현실성을 부가해 구체적인 생활 세계를 투시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내부자이고 중요한 것은 내부의 균열을 내는 성찰성이다. 김사과의 제2기 ‘소설되기’를 기대하는 이유다.

<관련기사>

▶[평론 당선작 전문] 청년 영매(靈媒)의 '소설되기'와 그 너머: 김사과론

<요약본>

평론 심사평
도발적이지만 … 치열하고 근원적인 문제의식

평론 본심 중인 서영채(왼쪽)·권성우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열 편의 비평문을 읽는 과정은 곧 비평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비평은 학문, 논리, 이성과 예술, 창작, 감성의 경계선에 존재하는 독특한 장르이다. 매력적인 비평은 온전히 논리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동시에 예술적 감성만으로도 채워질 수 없다. 이성적 논리와 예술적 감성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야말로 좋은 비평이 갖추어야할 소중한 요건이다.

 본심에 오른 응모작 대부분은 일정 경지에 도달한 유의미한 성과에 해당되지만, 비평의 본질에 대한 투철한 자각에 이른 글은 드물었다. 특히 엄밀하고 섬세한 논리가 필요한 대목을 지나치게 사적인 에세이 풍으로 메우는 경우를 자주 목도할 수 있었다.

 시인 황병승에 대해 논의한 ‘그 어둡고 착한 백발 소년은 세계를 어떻게 궁리하는가’와 소설가 김사과를 다룬 ‘청년 영매(靈媒)의 ‘소설되기’와 그 너머’를 두고 마지막까지 당선작을 고민했다.

 황병승론은 문학적 수련을 착실하게 거친 안정적인 글쓰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그 안정은 창의적인 안목과 주체적 시각이 부족하다는 사실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예술적 감수성을 지닌 글쓰기의 장점을 간직하면서도 좀 더 탄탄한 논리와 만날 때, 이 글의 필자는 앞으로 더 매혹적인 비평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김사과론을 안정된 비평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때로 지나치게 도발적인 논리라고 여겨지는 대목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어떤 응모작보다도 치열하고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김사과의 작품을 매개로 하여, 이 시대의 현실과 문학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고 명쾌한 사유를 펼쳐놓은 점을 높이 평가하며 우리는 이 글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기쁜 마음으로 합의하였다.

 앞으로 비평의 미학적 품격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을 거듭할 때, 당선자는 데뷔작을 능가하는 의미 깊은 비평문을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미래를 기꺼이 기다려보고 싶었다.

◆본심 심사위원=권성우·서영채(대표집필 권성우)
◆예심 심사위원=김수이·이수형

평론 당선 소감
소통 없이 갈고리로 잡아챈 건 아닌지 고민입니다

바닷가에서 우연히 숭어떼를 만나 낚시대를 꺼냈습니다. 빨간색을 좋아하는 숭어를 위해 바늘에 빨간 줄을 묶었습니다. 숭어가 수면에 올라와 찌는 수심 0m에 맞췄습니다. 예민한 숭어들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났고 유기물을 먹으러 개울 어귀로 몰려온 차에 가짜 먹이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밀당’과 눈속임을 버리고 갈고리가 세 개 달린 바늘을 꺼냈습니다. 일명 ‘훌치기’인데 잠시 훌치기의 윤리성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물고기와 어떤 소통도 시도하지 않고 갈고리에 채서 잡는 방식에 대해서요. 왜무만한 숭어가 하얀 배를 희번덕거리며 올라왔습니다. 숭어들은 지느러미와 아가미와 배에 고리가 걸려 피를 흘렸습니다.

 작가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걸고 쓴 작품들을 일관되게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연습이자 저 자신의 탐구이기도 합니다. 화두를 마련해준 김사과씨에게 감사 드립니다. 타인과 소통하기란 예민한 감각과 지혜가 필요한데 바다의 속물살을 훌치기한 것은 아닌지 고민하곤 합니다. 정과리(情과理) 선생님은 문학을 깊게 느끼는 재미를 알려주셨습니다. 늘물(恒水) 전영태 선생님은 삶과 문학이 어떻게 서로 보완하며 멋지게 어울릴 수 있는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기억에만 남게된 ‘동주문학회’는 가난하지만 편한 친정이었습니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의 은사님들 그리고 문우들의 자극이 없었다면 글을 써볼 엄두를 못 냈을 것입니다.

 숭어를 갯바위에서 회 떠서 먹었습니다. 짭조름하고 쫄깃한 맛이 혀에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나머지 산놈들은 먼 바다 쪽으로 놓아주었습니다. 뭐라뭐라 하지만 모국어 문학이 점점 풍요로워지는 요즘, 예민하고 살진 숭어떼를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길 기원합니다.

◆ 김유석=1976년 전북 임실 출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문예창작과 석·박사 졸업.

평론 본심 진출작(10편)

● 김수현 : ‘소설되기’의 과정과 진화 : 김사과론

● 김요섭 : 길 없는 시대의 걸음-박민규론

● 김정현 : 바벨탑의 언어, 몬스터/디오니소스의 악(惡/樂)-조연호 『암흑향』론

● 김지원 : ‘센티멘털’의 새로운 영토 : 하재연의 시에 대하여

● 박남현 : 그 어둡고 착한 백발 소년은 세계를 어떻게 궁리하는가-황병승의 가학적 판타지와 가능성

● 이수향 : 이야기의 오래된 미래-황정은의 최근 작품을 중심으로

● 이지은 : 다시, 포구마을 선착장에서-김훈의 문학적 도정을 따라서

● 이한나 : 병든(-ia) 앨리스 떨어뜨리기-황정은의 소설

● 조춘희 : 세미콜론(;)의 서정 혹은 서사-김언론

● 주현령 : 침묵의 시선, 맹목의 소리-이준규 시의 중성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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