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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의 마음과 세상] 국영수보다 중요한 공감 교육

중앙일보

입력

얼마 전 세월호 사건 유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을 하는 광화문에서 인터넷 사이트 ‘일베’(일간베스트) 회원들이 피자와 치킨을 먹는 폭식 퍼포먼스를 했다. 평소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을 지지하던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번만큼은 선을 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자식을 잃어 슬퍼하는 유가족들 면전에서 춤을 추고, 음식을 먹을 수 있었을까.

유가족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상상해본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사건이 하나 더 있다. 쓰레기장을 방불 하는 집안에서 발견된 어린이다. 엄마가 전혀 치우지 않아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등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집에 아이가 몇 년째 살았단다. 그런데 엄마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유가족에 대한 조롱과 제 아이에 대한 방임, 두 사건의 공통원인은 공감능력의 결여다. 공감(共感 empathy)이란 상상력을 발휘해서 다른 사람의 처지에 서 보고, 다른 사람의 느낌과 시각을 이해하며 그 내용을 활용해 자신의 행동지침으로 삼는 마음의 방법이다.

공감능력은 동감과는 다르다. 동감은 연민이나 불쌍하다는 마음을 가질 뿐 그 사람의 감정이나 시각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상대의 처지로 감정이입할 수 있었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공감이란 인간이 갖는 타고난 본능이자 특성이다. 이 능력이 선천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자폐증의 핵심 증상 중 하나다. 안타깝게도 지금 사회는 후천적 공감결핍증 환자들이 늘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어릴 때부터 공부만 잘 하면 모든 게 용서되는 환경, 가족 내에서 적절한 감정의 공유와 공감의 이해를 배울 기회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공동체의 해체, 경쟁의 강화, 개인주의적 경향의 일상화의 흐름이 상호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타고난 공감능력을 배양하는 법을 배울 기회도 줄었다. 차라리 공감의 채널을 끊고 매몰차게 사는 게 생존에 도움이 된다고 여길만한 현실이다. ‘우리 사회의 흐름이 이렇구나’라고 넋 놓고 보고만 있기엔 나타나는 현상들이 끔찍하다. 이제라도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중 하나가 1995년 캐나다의 부모문제 전문가 매리 고든이 시작한 ‘공감의 뿌리’ 프로그램이다. 초등학교 교실에 갓난아기를 안은 부모가 교실로 들어오고, 학생들은 아기의 발달과정을 함께 지켜본다. 이어 감정반응과 세상을 바라는 태도에 대해 토론하고 아기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보는 노력을 한다. 이런 만남을 정기적으로 하면서 학생들은 타인의 감정과 관점을 이해하는 공감능력이 향상됐다.

토론은 나아가 동급생과 공감하기, 또래 괴롭히기의 문제의식까지 이어졌다. 이 프로그램은 영국과 뉴질랜드까지 확산돼 약 50만 명이 참여했다. 실제로 프로그램을 실시한 학교에서 학생들 사이의 협력행동이 증가하고 가정 내 갈등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지’라고 개탄만 하기보다 적극적으로 공감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이 시급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선 국영수보다 더 중요한 공부가 돼야 하지 않을까. 사회 곳곳에서 경고음이 들리고 있다.

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jh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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