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정민이 만난 사람 곽영훈 '사람과 환경 그룹' 회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꿈꾸는 도시 디자이너’.

 곽영훈(71) 사람과 환경그룹 회장에게 붙어다니는 수식어다. 그는 속칭 ‘잘나가는 성공한 건축가’다. 명문고(경기고)와 명문대(MIT·하버드)를 나왔다. 서울 올림픽공원, 한강종합개발, 대학로, 영종도 배후도시, 대전 테크노폴리스 등 굵직한 국가정책 사업이 그의 손을 거쳤다. 이집트의 시나이 테크놀로지 밸리 조성 계획을 세웠고 부처님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 동산을 불교도 순례지로 개발하기 위한 세계평화시 프로젝트의 마스터플랜도 짜고 있다. 대학교수(하버드·홍익대)를 지냈고 지금은 정책계획과 환경설계를 융합시킨 회사 사람과 환경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화려한 이력에만 자신을 가둬두지 않았다. 도시 설계에서 시작된 꿈을 세계시민운동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곽 회장은 “정치·외교 등 이해관계에 놓인 국가 간에 있을 수 있는 제약을 넘어서 도시 간 교류와 협력을 통해 지구촌이 윈- 윈 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일종의 평화운동”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위해 글로벌 시민단체인 세계시민기구(WCO·World Citizens Organization)를 만들어 위원장을 맡고 있다. WCO는 2006년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서 실크로드 시장(市長) 포럼을 연 것을 시작으로 1년에 한 번씩 실크로드 도시들을 옮겨 다니며 국제회의를 열고 있다. 지난 3~5일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시에서 열린 제9회 실크로드 포럼에선 실크로드 도시들 간의 다양한 교류를 통해 실크로드 경제벨트 건설에 협력하자는 ‘우루무치 선언’이 채택되기도 했다.

 도시건축가인 곽 회장이 꿈꾸는 21세기 세계시민운동은 뭔가. 그를 이 길로 이끈 건 무엇이었을까. 자세한 얘기를 듣기 위해 지난 11일 서울 신당동의 곽 회장 자택을 찾았다.

곽영훈 회장은 “세계시민운동은 인종·문화가 다른 게 오히려 소중한 가치란 걸 알리는 평화운동”이라고 했다. [최승식 기자]

 - 왜 세계시민운동인가.

 “우리는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살고 있지만 국가는 정치색이 강하고 국방·외교·경제 등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사람을 덩어리져서 딱딱하게 만든다. 딱딱하면 서로 부딪치게 된다. 국가 간 충돌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교류·연대하면 이런 갈등을 풀고 충돌을 오히려 막을 수 있다.”

 - 실크로드 포럼을 여는 이유는 뭔가.

 “과거 동서양의 교역로였던 실크로드는 리얼 스토리다. 한족·페르시아·로마 등 수많은 민족이 국경 없이 교류하면서 이념의 벽을 허물고 문명을 주고받으며 삶을 풍요롭게 했다. 실크로드는 21세기 세계시민운동의 좋은 본보기다. 실크로드의 도시와 시민들이 모여 ‘윈- 윈의 실크로드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거다.”

 - 이번 우루무치 포럼의 성과는.

 “올해 포럼은 낙후된 중국의 서부 개발을 위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실크로드 경제벨트 구상과 맞물리면서 성황을 이뤘다. 26개국 52개 도시에서 전·현직 시장 등 600여 명이 참가했다. 내가 폐막사에서 종교·문화·인종의 다름이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축제의 요소라고 했는데 모두 동의했다.”

 - WCO는 생소하다.

 “많이 받는 질문이 WCO가 어디에 등록된 단체냐는 거다. 외교부냐, 서울시냐. 아무 곳에도 등록돼 있지 않다고 하면 빨리 등록하라고 재촉하지만 WCO 집행부는 세계시민기구인데 특정 정부, 특정 부서에 등록하는 건 맞지 않다며 자연스러운 조직을 원한다. 자유롭게, 마치 축제를 하듯 시민들과 대화하고 소통하고 토론하자는 거다.”

1988년 9월 올림픽 평화의 불에 점화식을 마친 뒤 함석헌옹의 손을 잡고 기뻐하는 곽영훈 회장. 함옹은 .이걸 보려고 지금까지 살았다.며 눈물지었다고 한다. [사진 곽영훈 회장]

 - 도시건축가인데 세계 평화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형님(곽일훈)이 통일헌법을 만들어 통일에 기여하겠다며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나는 비무장지대(DMZ) 근처에 통일평화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 건축을 공부했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이 통일평화시에서 만나 통합과 화합을 모색하고 젊은이들에게 평화를 교육하는 도시를 만들고 싶다는 꿈에서 시작됐다.”

 곽 회장은 유학파다. MIT에서 건축학 학사·석사학위를 받고 도시설계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하버드대 케네디행정대학원에서 정책학을 수료했고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해선 서울 올림픽공원 설계를 맡았다. 몽촌토성을 복원해 나지막한 구릉과 생태 공원이 어우러지도록 한 방이동의 올림픽공원은 이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올림픽을 앞둔 1987년 공산 진영을 중심으로 일었던 서울 올림픽 보이콧 움직임이 가장 큰 고비였다”고 회고했다.

 - 어떤 활동을 했나.

 “정부 활동과는 별개로 민간이 나서서 세계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운동을 벌였다. 윤보선·함석헌·이태영·서영훈·한경직·구상·문태갑씨 등 뜻이 맞는 지도층 인사들이 함께해 줬다. SAO(Seoul Assembly Olympeace)라는 걸 만들어 세계 각국의 정치인·학자·과학자·운동선수 등에게 올림픽 참가를 독려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올림픽 평화운동을 벌였는데 이때부터 WCO의 활동이 시작된 셈이다.”

 - 북한은 끝내 불참했다.

 “공산권 국가, 특히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를 설득하는 게 급선무였다. 당시 소련과는 수교가 안 된 상태여서 직접 만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외국인 친구를 통해 (당국의 눈을 피해) 편지를 보냈다. 올림픽은 평화의 제전이고 젊은이들의 축제이니 보이콧하지 말아 달라. 당신이 한국에 오면 묵을 수 있도록 서울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테니 꼭 방한해 달라고 썼다. 북한은 불참했지만 소련 등 동유럽권 국가는 대부분 왔다.”

 실제로 곽 회장은 87년에 서울 신당동 남산 자락에 외빈들을 위한 집을 지었다. 서울 올림픽 기간 중 고르바초프의 방한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90년 고르바초프가 서울에 왔을 때 만날 수 있었다며 비화(秘話) 하나를 들려줬다.

 “고르바초프는 내가 보낸 편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내용이니 당신이 회고록에 쓸 수 있도록 메모를 하라고 했다. 내용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먼거리를 기차를 타고 자기를 찾아와서 남한을 고립시키려면 서울 올림픽에 불참해야 한다며 보이콧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내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주창한 사람으로 보이콧할 수 없다고 하니까 김일성이 실망해서 돌아갔다’는 얘기였다.”

청소년기의 특별한 경험이 인생의 진로를 바꿔놓는 경우가 있다. 곽 회장이 바로 그런 경우다. 62년 경기고 학생회 의장을 맡았을 때 적십자사의 주선으로 미국 정부 초청을 받았다. 방미단엔 4명의 고교생이 있었는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그중 한 명이었다. 방문단은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고 미국 곳곳을 견학하며 선진 문물을 접했다. 미국에서 돌아와 보니 학교가 발칵 뒤집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은사를 경기고 교장으로 임명하자 ‘낙하산 인사’에 반발해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이다. 곽 회장은 주동자로 몰려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 일이 계기가 돼 당시 최두선 적십자사 총재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됐고 도시건축과 국가설계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 93 대전엑스포 마스터플랜을 짰고 2012 여수 엑스포 유치위원장을 맡았다. 엑스포에 주목한 이유는 뭔가.

 “64년에 뉴욕에 갔을 때다. 데비라는 미국 여학생이 나를 뉴욕 엑스포장에 데려갔다. 43m짜리 대형 지구의 속을 박람회장으로 꾸며 첨단 문물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영감을 얻었다. ‘이걸 한국으로 가져갈 수 없다면 한국에서 이걸 하자’고 생각했다. 국가가 발전하려면 집단 지성이 발휘될 수 있는 국제행사를 유치하는 게 방법이라고 봤다. 그래서 올림픽과 엑스포에 매달렸다.”

 - 향후 계획은.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여행하면서 자유롭게 어울리며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될 수 있도록 WCO 하우스를 곳곳에 만들려고 한다. 지난해 포럼이 열렸던 터키의 가지안테프에 1호 WCO 하우스가 만들어졌다. WCO가 젊은이들이 지구촌 문명시대를 살아가는 데 ‘문화의 다름’이 오히려 소중하다는 걸 아는 데 길잡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이정민 정치·국제 에디터
사진=최승식 기자

[S BOX] 3김 반대하며 출범한 개혁신당 부대표 맡기도

곽영훈 회장은 정치권에도 몸담은 적이 있다. 1995년 장을병 전 성균관대 총장, 홍성우 변호사가 공동대표를 지낸 개혁신당에서 부대표를 맡았다. 개혁신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끌던 민자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 김종필 전 총리의 자민련으로 3분 된 신(新) 3김구도에 반발, 법조·학계와 일부 재야세력이 모여 만든 신당이었다.

개혁신당이 그해 12월 이기택 전 총재가 이끌던 민주당과 합당하면서 곽 회장은 ‘민주당 호’로 옮겨 타게 된다. 이때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만나 가까워졌다. 곽 회장은 이듬해 총선 때 국가경영기획단장을 맡아 비례대표로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98년엔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중도 사퇴했다. 경쟁 상대는 이명박 전 대통령,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곽 회장은 “관료나 정치인에게 맡기면 서울이 더 망가질 것 같아 도시계획 전문가가 나서야 한다”며 출사표를 던져 화제를 모았지만 공직사퇴 시한을 규정한 당규가 바뀌는 바람에 후보 자격을 상실했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 정책특보를 맡기도 했다.

 그는 “정치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며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제도 정치권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부인은 18대 의원(새누리당)을 지낸 김정 전 의원이며 7선 의원을 지낸 오세응 전 국회 부의장이 매형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