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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정치권은 경기 악화 심각성 알고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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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경제선임기자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지난달 말 “한국이 디플레이션 초기 단계에 와 있다”고 하자 이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처럼 아직 소비자물가지수가 마이너스까지 떨어지지 않았는데 웬 디플레이션이냐는 반론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는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디플레이션 초기 단계라는 말이 나올 만큼 체감경기가 나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서울 마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쉰네 살의 이언태씨의 경우를 보자. 그는 25일부터 주변 식당보다 30%가량 싼 메뉴를 주력 상품으로 내놓으려 한다. 삼겹살은 1만원(180g), 한 마리 통째로 집어 넣는 동태탕은 6000원이다. 뚝 떨어진 매출을 회복하기 위한 배수의 진이다.

세월호 참사 전 그의 가게는 늘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직후 개점휴업이나 다를 바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이대로 가다간 가게 문을 닫을 것 같아서 박리다매로 마지막 몸부림을 쳐보려 한다고 했다. “가격을 낮췄으니 손님이 더 많이 오실 걸로 기대됩니다. 평소 식사와 고기 주문 비율이 8대 2였는데 6대 4로 바뀌면 매출이 올라 영업이 정상화될 수 있거든요.”

사실 그에겐 도박이기도 하다. 고객들이 지갑을 안 여는 상황에서 가격을 낮췄는데도 잘 안 되면 결국 문을 닫을 수도 있어서다.

그래서 필승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저와 종업원 17명은 머리에 태극기 문양의 끈을 동여매려고 합니다. 오시는 손님에게 기(氣)를 불어넣으려는 거죠. 띠에는 ‘자랑스런 대한민국, 힘내자!’라고 쓸 겁니다.”

이 마포 식당 주인의 절절한 감성 마케팅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길거리 체감경기 악화가 심각하다. 최경환 경제팀이 기금을 동원해 41조원을 풀고,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2.25%로 낮춰서 경기부양에 나선 이유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한국도 아베노믹스를 시작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재정과 금융을 총원동했다는 의미에서다.

이 대목에서 궁금해지는 건 이런 노력의 종착역이다. 과연 앞으로 좋은 방향으로 달라지는 것일까. 2012년 이후 3년 연속 2~3%대 저성장의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누구나 알고 싶을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 상황에서는 낙관적인 기대는 어려워 보인다. 소비를 살려야 기업투자 확대와 경제 성장을 바라볼 수 있는데 지금까지 나온 대책으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어서다. 처음엔 잘나가는 듯하다 최근 들어 신통치 않은 결과를 보이고 있는 아베노믹스를 보면 알 수 있다. 마포 식당 주인의 경우 자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중국에서 사업을 벌여 쏠쏠하게 돈을 벌게 되자 국내에서도 작은 사업을 해보려는 건데 잘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 의지가 실종된 게 근본적인 문제라서 그렇다.

이는 딱 일본의 전철을 밟는 형국이다. 물가가 계속 내려가고 장기불황에 빠지는 디플레이션 말이다. 한국은 일본과 다르다는 시각이 있지만 실상은 어떤가. 디플레의 배경에는 고령화와 가계소득 정체, 소비 둔화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일본은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디플레의 늪에 빠져들어갔다. 국내에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아직 플러스 상태(1%대)니까 디플레라고 볼 수 없다고 하지만, 점점 디플레를 닮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돈이 있는 장·노년층은 장수에 대비해 허리띠를 졸라맨다. 젊은 층 역시 지갑을 열 형편이 못 된다. 취업이 어렵고 간신히 직장을 얻어도 여유가 없다. 소득 증가율이 크게 둔화되면서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6%대를 넘던 연평균 실질 임금상승률이 최근엔 0.3%로 떨어졌다. 일본이 앞서 20년 전부터 겪고 있는 현상들이다. 다른 게 있다면 한국은 가계가 1040조원의 부채폭탄까지 떠안고 있어 지갑을 열 여력이 더욱 없다는 점이다.

정부가 아무리 강조해도 국민이 지갑을 안 여는 것은 한국 경제 곳곳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것을 체감적으로 알고 있어서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한국 경제가 느슨해진 경쟁력을 다시 정비하고 기업가 정신에 충만해 글로벌 시장을 주도한다는 소식이 쏟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정부와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는 나름 애를 쓰고 있지만 그간의 재정·통화정책은 마중물 역할에 불과하다. 대기업이 투자에 나서야 고용과 소비가 늘어나는 선순환이 가능한데 그럴 여건이 안 된다. 밖으로는 경쟁이 치열하고 안으로는 규제가 과도해 투자 의욕이 꺾여 있는 것이다. 정부도 이를 알고 구조 개혁과 규제 혁파에 나서고 있지만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

정부가 아무리 경제·민생 대책을 만들어내도 정치권은 정쟁을 앞세운다. 그렇게 발목이 잡힌 법안이 93개에 달한다. 즉각 경제를 살릴 것 같던 정부 대책들이 공허한 메아리로만 떠도는 이유다. 국가가 총력을 다해 마포 식당 주인 같은 절박한 심정으로 경제 살리기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엄습하는 디플레의 공포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경제 살리기의 골든타임을 더 이상 허비할 여유가 없다.

김동호 경제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