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왕후의 윷놀이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인현왕후의 윷놀이판이 발견된 것은 하나의 경이다.
인현왕후가 직접 작성한 놀이판이라는 뜻에서뿐 아니라 이를 소일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윷놀이판의 명칭이 「규문수지녀행지도」라 한 것은 분명 놀이가 주목적이면서도 여인의 행실을 가르친다는 형식을 취한것에 묘미가 있다. 남자들의 놀이판이 승경도라한 것과 같은 취지다.
국어학자들은 주로 17세기 국어현상 연구를 위해 좋은 자료라고 평가하지만 그보다는 여속.오락연구에 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 인현왕후의 인간적면모가 새로 부각된다.
조선왕조 숙종의 계비인 그녀는 1689년 왕자 균의 책봉문제로 기미환국을 일으켰을 때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당해 서인이 됐었다.
그 뒤 갑술옥사로 장희빈이 몰락하면서 6년만에 복위했다.
그 파란만장한 사연은 『인현왕후전』으로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인현왕후의 인품은 예의 바르고 언행이 청초하여 조선시대 사녀의 전형이었다. 폐위되어 친가에 거처할 때는 스스로 죄인임을 칭하고 햇빛보기를 꺼리며 추녀 끝에 걸린 달조차 제데로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물론 비빈을 포함하는 조선사녀의 일반적 풍속이었다. 이들은 주로 『소학』과 『훈서』를 익혔다. 특히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가 중국의 열녀.소학.여교.명감을 추리고 보태 만든 『내훈』은 조선시대 여교의 기본교과서 였다.
여자가 재주없으면 오히려 덕이라고 하는 「여자무재반시덕」을 가리치던 시절이니 한글을 익히는 것만도 과분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러나 그시대 사녀들이 배운 것은 인종의 덕이 주였다. 그들에게 변변한 오락이나 인간적인 솔직한 애환의 표시가 있기가 어려운건 당연했다.
그러나 인현왕후가 폐비된 몸으로 소일을 위해 윷놀이를 즐겼다는 증거인 『여행지국』의 발견은 또다른 흥미를 끈다.
최근 발견된 『한중록』의 원본 『한중만록』에서도 작자인 혜경궁홍씨가 어렸을 때 굵은 무명옷만 입고 자랐기 때문에 당시 새로 나온 청나라산 비단옷과 멋진 헤어스타일이 하고 싶었다고 실토한 대목이 나온다. 미운 사람들엔 「쥐무리같은 놈」이란 표현도 했다.
이는 신분이나 체모의 굴레를 벗고 때로는 주착스럽게, 때로는 험구스럽게 감정을 실토했다는 점에서 훨씬 인간적이다.
당시 여인들은 그런 사회적 제한 속에서도 나름대로 오락을 즐겼다. 윷이나 쌍육외에도 소리도 하고 시조창도 했으며 담배까지 즐겼다고도 한다.
그런 중에도 내외가 엄하여 남녀가 어울리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태종때 진양대사는 아내와 윷을 놀았다고 사헌부의 계에 따라 국문을 당한 기록도 있다.
그런 시대에 인현왕후가 윷놀이로 외로움을 달랬던 인간적 풍정이 유달리 그 윷놀이판에서 느껴지는 것도 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