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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실린 대량 생산법 개발 … 노르망디 상륙작전 숨은 공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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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943년 초 미국의 전쟁생산위원회는 ‘기적의 항생제’ 페니실린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당시 미국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획 중이었다. 병사들이 쓸 페니실린을 대량 조달해야 하는데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너무 귀하다 보니 임상시험 환자의 오줌을 걸러 페니실린을 다시 회수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푸른곰팡이는 변덕스럽기가 오페라 가수 같고 수율(收率)은 저조하다. 페니실린 추출은 살인적이고 정제는 재앙”이라고 한탄했다. 기적이 없는 한 ‘기적의 약’은 신기루였다.

 그때 뉴욕 브루클린의 한 부둣가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화이자사의 엔지니어 재스퍼 케인(사진)이 개발한 새 발효법이었다. 지금은 글로벌 제약회사가 된 화이자는 원래 저질 수입 레몬류에서 구연산을 추출하는 업체였다. 하지만 원료난 탓에 1919년부터 설탕을 곰팡이로 발효시켜 구연산을 만들었다. 실험실 사환으로 입사한 케인은 곰팡이 덕에 구연산 가격이 6분의 1로 떨어지는 과정을 목격하고 야간대학 화공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그는 얇은 배양판을 여러 개 쓰는 기존 공정 대신 크고 깊은 발효조를 사용하는 딥탱크(Deep Tank) 발효법을 고안했다. 전기모터를 이용해 발효조 밑바닥의 배양액을 휘저으며 공기를 불어넣는 방식이었다.

케인이 개발한 최초의 페니실린용 딥탱크 발효조.

 케인의 발효법은 구연산보다 의약품 원료 제조에 더 적합했다. 그 덕분에 화이자는 제약회사로 변신했고 페니실린 양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화이자는 처음 과학자들에게 배운 대로 소형 플라스크를 이용해 푸른곰팡이를 배양하려 했다. 하지만 플라스크는 품질 관리가 힘들었다. 푸른곰팡이 종균은 맨해튼에서 브루클린으로 옮기는 도중 죽기 일쑤였다.

 케인은 자신이 개발한 딥탱크 발효법을 쓸 것을 주장했다. 화이자 이사회는 회사의 존폐가 걸린 표결 끝에 그에게 공정 개발을 맡겼다. 4개월 뒤인 1944년 3월 1일, 옛 얼음공장을 개조한 공장에서 페니실린 생산이 시작됐다. 2만8000L 발효조 14개에서 푸른곰팡이를 배양한 뒤 추출액을 냉동 건조시켜 페니실린을 만드는 케인의 공정은 생산량과 안정성이 모두 뛰어났다.

 그해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국 병사의 90%가 화이자의 페니실린을 가져갔다. 페니실린 생산량은 이후 3년 만에 100배로 늘고 시장가격은 100분의 1로 줄었다. 케인의 팀은 스트렙토마이신과 테라마이신의 첫 대량 생산에도 성공했다.

 곰팡이와 한평생을 보낸 케인 덕에 오늘날 항생제는 공급 부족은커녕 오남용을 걱정할 만큼 넉넉히 생산되고 있다. 페니실린은 인공합성법이 개발됐지만 여전히 수많은 항생제와 살충제, 일부 백신이 그의 딥탱크 발효법으로 제조되고 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한 공을 따지자면 페니실린을 만들어 노벨상을 수상한 플레밍·플로리보다 케인이 더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신종플루가 세계를 휩쓸고 에볼라의 대유행이 우려되는 요즘, 우리에겐 신약 개발자 못지않게 ‘제2의 케인’이 더 필요하다.

이관수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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