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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명량해전과 테르모필레전투

중앙일보

입력

한국의 영화사상 최고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鳴梁)”을 보면, 이순신 장군은 선조가 수군을 해체하고 남은 장병을 육군에 편입하라는 권고를 감히 듣지 않는다. 그는 일본 수군이 전라도 충청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량의 좁은 바다를 지나 갈 것으로 확신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은 폭이 좁고 조수의 흐름이 빨라 바다물이 소용돌이치는 천혜의 요충지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는 말대로 이순신 장군은 명량의 지리를 잘 이용하면 남아 있는 13척의 전함으로도 수백 척의 일본군을 능히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일본의 수군이 이순신 장군의 계략에 빠져 명량의 소용돌이에 갇혀 서로 부딪치면서 궤멸해 가는 모습을 보고 몇 해 전 본 외화 “300”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고대 에게 해(海)의 강국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수차례 걸쳐 공격하였으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연합하여 잘 막아낸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은 그리스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화병으로 죽고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부왕의 유업을 완성하려고 대군을 동원 수륙 양 방향으로 그리스를 대거 침공한다. 그리스 판 임진왜란이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타 정예 근위병 300명을 이끌고 죽음의 관문(關門) 테르모필레(Thermopylae)협곡에서 페르시아 30만(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170만) 육군을 맞아 싸우기로 결심한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불과 13척의 배로 수 백 척의 적을 맞이해 싸운 것과 같다.

명랑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13척의 전함이외에도 백성들의 어선 수 백 척이 지원한 것처럼 레오니다스에게는 스파르타 정예군 300명 이외 그리스 각지에서 모인 4000명의 병사도 합류하였다.

페르시아 육군은 그리스 본토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케도니아 해안의 죽음의 관문 테르모필레 협곡을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30만의 페르시아 군대는 자신만만하게 테르모필레 협곡에 들어섰다. BC 480년 8월이었다. 그러나 지리적 우위를 이용한 이틀간의 스파르타 군의 강력한 저항에 페르시아 군대는 많은 희생을 내고 물러서야했다.

그러나 3일째 되는 날 현지인이 그리스를 배신하여 우회로를 알려주는 바람에 페르시아군은 우회로를 통해 스파르타 군의 배후를 치게 되었다. 레오니다스 왕을 비롯한 300명의 스파르타 군을 포함한 그리스 군은 앞뒤로 협공을 당했다.

명랑해전에서는 빠른 조류에 익숙한 조선 수군이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 30여척의 적선을 격침시키고 적장 구루시마(來島通總)를 포함 2000여명의 일본 수군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나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은 거의 희생을 당하지 않은 깨끗한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그리스의 명량(鳴粱) 테르모필레 협곡의 전투는 레오니다스 왕을 포함한 스파르타 정예군 300명 전원이 무참히도 전사한 슬픈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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