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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에 뜬 김일派·역도산派, 추억 되살리고 시장 살리고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경기도 능곡전통시장에서 지난달 30일 열린 프로레슬링 대회에서 강형관 선수(닉네임 ‘솔저강’)가 로프 위에서 상대 선수를 향해 뛰어 내리고 있다. 김춘식 기자

상고머리 일본 선수의 필살기 ‘코브라 트위스트’(상대의 뒤편에서 어깨 밑으로 상체를 넣은 뒤 몸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으로 고통을 주는 공격)에 괴로워하던 콧수염 대머리 한국 선수. ‘경기가 이대로 허무하게 끝나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괴력을 발휘해 상대를 업어 메쳐버린다. 이어진 두 차례의 날아 차기. 일본 선수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링 안을 돌아다닌다. ‘촤악-’. 대머리 선수는 생수 한 병을 자신의 머리에 부었다.

 “멋지다.” 옆 아주머니가 고함을 질렀다. 노지심(56)이라는 이름의 대머리 선수는 상대의 뒷덜미를 잡고 회심의 일격인 박치기를 작렬시킨다. 링 바닥에 누운 일본 선수 위로 한국 선수가 몸을 포개어 짓누르자 심판이 바닥을 세 번 내리쳤다. 노지심 선수의 역전극에 1000여 명의 관중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지난달 30일 열린 한·일 국제프로레슬링 대회 현장. 사각의 링은 장충체육관도 문화체육관도 아닌 경기도 고양시 능곡전통시장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추석 대목 맞이 시장 이벤트였다.

일본 선수단을 이끌고 온 역도산의 손녀 모모타 레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자.

 대회 시작 4시간 전인 오후 4시, 시장 번영회가 준비한 500여 개 플라스틱 의자는 이미 사람으로 꽉 찼다. 대형 앰프에서 트로트 메들리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이날의 주인공인 15명의 한국과 일본의 프로레슬링 선수들이 도착했다. 20, 30대가 주축인 일본 선수들과 달리 한국 선수들은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40, 50대였다. 한국팀의 단장인 이왕표(60) 선수는 몸보다 훨씬 큰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당당한 체구를 자랑했던 그는 최근 담도암으로 투병생활을 했다.

 이들이 향한 곳은 경기장 바로 옆의 ‘월셋방 있습니다’라고 붉은 글씨가 쓰여 있는 여관. 여관 옥상이 선수 대기실이었다. 일본 선수들은 어리둥절해하며 큰 가방을 하나씩 들고 4층까지 계단을 밟았다.

 레슬링협회 간부는 링 상태 점검에 들어갔다. “이런 바닥에서는 선수들 살이 다 까진다”며 딱딱한 바닥을 지적하자 번영회에서 급하게 푹신한 합성수지 바닥재를 구해다 깔고 청테이프로 고정시켰다.

WWF 세대에게는 낯선 풍경
초등생·중학생 때 화려한 미국 프로레슬링 ‘WWF(현재는 WWE)’ 경기를 보며 자란 나 같은 세대에는 낯선 풍경이었다. 김일 박치기와 천규덕 당수의 ‘전설’, 일본 선수 안토니오 이노키와 우리나라 선수의 시합이 있는 날이면 모두 TV 앞에 모여 길거리도 한산했다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를 들은 기억은 있다.

 시합에 출전한 한국 프로레슬러들에게 ‘현실’에 대해 물어봤다. 현재 한국프로레슬링연맹에 등록돼 활동하는 선수는 40명가량이다. “우리끼리는 지리산 반달곰보다 우리 수가 더 적을 거라고 얘기합니다.” 조경호(27) 선수가 씁쓸해하며 말했다. 경기 때마다 일부러 찾아오는 열성팬은 10명 정도라고 했다.

 “레슬링 경기 수입으로 생활이 되느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다들 하는 일이 따로 있다”고 대답했다. 그의 옆에 있던 ‘인간 어뢰’라는 닉네임을 가진 김남훈(40) 선수는 이종격투기 해설가 등으로 간간이 방송에 출연 중이다. ‘돌고래’라는 별명을 가진 임기영 심판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선수도 있었다.

 재래시장 복판에서 시합하게 된 데 대해 한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랑 비슷한 신세 아닙니까.” 대형마트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시장과 오래 전에 사양 종목이 되어버린 한국 프로레슬링. 동병상련의 처지라는 얘기였다. 김 선수는 “이런 곳에서 경기하면 관중과 스킨십을 나눌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며 웃어 보였다. 이날 시합에서 김 선수를 포함해 두 명의 한국 선수는 레슬링화도 없이 일반 운동화를 신고 경기를 치렀다. 전문 복장으로 잔뜩 멋을 낸 일본 선수들과 대비됐다.

 오후 5시 정각, 트로트 메들리 소리가 멈추고 시장 번영회 부회장(장재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졌다. “여러분, 능곡 전통시장은 여러분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한가위를 맞이하여 국제 프로레슬링 대회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북한에서도 지금 이 시간에 세계 프로레슬링 대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바로 이곳에서 피가 터지고 다리가 부러지는 레슬링 경기가 열립니다.”

1000여 명 관중으로 ‘흥행’ 성공
이 시장에서의 레슬링 대회는 이번이 두 번째. 장 부회장은 “지난해 5월 시합을 한 번 열었는데 반응이 좋아 다시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우시장으로 유명했던 능곡시장은 여느 전통시장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프로레슬링 시합에 대한 기대를 묻는 질문에 정육점 주인은 “다른 것도 많은데 왜 하필 프로레슬링인지 모르겠다”고 화를 냈다. 인기 연예인들을 불러야 장사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분위기였다. 장 부회장은 “지난해엔 젊은 층까지 포함해 많은 사람이 왔다”고 얘기했지만 관중석에서 20, 30대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오후 7시40분, 두 시간 넘게 진행된 노래와 댄스 공연에 청테이프로 붙여놓은 바닥재가 다 뜯겨나간 상태에서 대회가 시작됐다. 링 바로 앞까지 관중이 가득 찰 정도로 ‘흥행’은 성공이었다. 50대 이상이 대부분이었지만 아이들도 제법 모였다. 태권도복을 입은 초등학생들이 링 바로 옆 미용실 창문 밖으로 머리를 빼고 재잘거렸다.

 식순의 마지막인 고양시장의 축사. “여러분, 제가 빨리 축사를 마치시길 바라시죠. 꼭 한 말씀만 하자면 시장의 활성화가 ….” 한 주민이 찬물을 끼얹었다. “아따, 고만하쇼!”

 드디어 경기 시작. 100㎏이 넘어 보이는 두 거구가 서로를 노려보다 달려들어 서로 손으로 가슴팍을 후려친다. 어설프게 적중한 드롭킥보다 타이밍 맞춰 뒤로 자빠지는 상대의 ‘리액션’이 더 눈길을 끈다. 로프 반동을 이용한 가격으로 육중한 육체들이 격렬하게 맞붙었다. “어이 거기 앞에, 좀 앉아.” 할아버지의 고함 소리와 자리 다툼, 말싸움을 벌이는 아저씨들의 시끌벅적함 속에서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생계 걱정하던 선수들 영웅 변신
선수들은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땀으로 범벅이 됐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고 있다던 젊은 프로레슬러는 로프 위로 올라가 두 손으로 V자를 만들며 관객들 앞에 섰다. ‘돌고래’ 심판은 판정에 불만을 품은 일본 선수에게 ‘폭행’을 당했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서 있는 사람과 앉아 있는 사람의 경계는 무너진 지 오래. 여관 옆 청과물집 아들은 어느새 진행 요원으로 둔갑해 노인들의 이동을 도왔다. 자리를 놓고 싸우던 아저씨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나란히 서서 동시에 팔을 번쩍번쩍 치켜세웠다. 선수들은 이날 장터의 영웅이었다. 아이·어른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선수의 손을 잡아당겨 손등에 뽀뽀하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요즘 같은 때에 무슨 레슬링이냐”며 못마땅해했던 정육점 주인도 가게를 정리하며 “저렇게들 열심히 하는데. 내년에 다시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버지 세대가 소년이었던 시절에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는 한국 프로레슬링은 그렇게 변두리 장마당에서 또 다른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강승한 인턴기자 kshwvv@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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