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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0년대 인기 폭발 … 일본 선수 때려 눕히는 짜릿함에 열광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한국 프로레슬링의 발상지는 부산 국제종합체육관이다. 1950년대 후반 그곳의 레슬링 사범인 장영철(1928~2006)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역도산(1924~63)을 보고 프로레슬링 선수를 꿈꾸며 독학으로 기술을 익혔다. 태권도 사범 출신 천규덕(82)이 장영철의 도장으로 들어와 60년대 초 부산에서 함께 레슬링 경기를 열었다. 64년 동양방송(현 JTBC)이 개국할 때 기념으로 레슬링 경기를 중계했다.

김일(1929~2006)은 57년 일본에서 역도산 체육관의 문하생 1기로 들어가 60년대 초 일본 및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휩쓸었다. 그는 역도산 피살 2년 뒤인 65년 12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조선호텔에서 열린 귀국 기자회견에 전 매스컴이 모였다. 이때부터 박치기의 김일, 당수의 천규덕, 드롭킥의 장영철로 대표되는 한국 프로레슬링 전설이 시작됐다.

프로레슬링은 주요 선수들이 가진 독특한 개성과 다양한 공격 기술로 인기몰이를 했다.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 시대를 겪은 한국 국민들은 일본 선수를 때려눕히고, 미국 선수와 대등히 맞서는 한국 선수들에게 열광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도 팬이었다. 한ㆍ일전이 꾸준히 열린 배경이다. 서울 장충체육관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메카’가 됐다. 경기 날마다 8500석의 관중석이 가득 찼다. 한 외국 선수가 김일에게 “내일 저녁 7분 내에 뼈다귀만 추려서 병원으로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 일간지에 대서특필 되던 시절이었다.

프로레슬링은 장영철의 ‘쇼’ 발언으로 한때 위기를 맞았다. 65년 11월 28일. 5개국 친선 프로레슬링 경기에서 장영철이 일본의 오쿠마 모토시의 허리 꺾기에 비명을 지르자 그의 제자 10명이 링 안으로 난입해 병 등으로 오쿠마를 마구 때리는 일이 벌어졌다. 사건은 경찰 수사로까지 번졌고, 장영철은 “프로레슬링은 사전에 승패를 정하는 쇼”라고 진술했다. 프로레슬링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악재였다. 하지만 TV 판매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프로레슬링 중계 시청은 최고의 국민 오락이 됐다. 70년대 중반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71·일본 참의원)의 대결에 전국민이 TV 앞에 모여 앉았다.

그러나 80년대 초반부터 프로레슬링은 프로 야구ㆍ축구ㆍ씨름의 인기에 밀려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77년에 데뷔한 김일의 제자 이왕표(60) 선수는 “83년께부터 TV 중계가 거의 끊어졌다”고 기억했다. 84년에 인기의 부활을 노리며 천규덕ㆍ김광식 등이 출전하는 극동헤비급 대회를 열었으나 대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일본의 ‘반칙왕’들에게 억울하게 당하다가 마지막 한 방으로 경기를 뒤집는 유사한 패턴의 경기, 1세대 스타들의 뒤를 이을 신진 육성의 실패, 오락성 뛰어난 미국 프로레슬링의 인기 등 몰락의 이유는 다양했다. 그 결과 격투 스포츠 중에서도 UFC 등의 이종격투기에 밀리며 찬밥 신세가 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 중인 프로레슬러는 40명 안팎. 선수 대부분은 별도의 생계 수단을 가지고 있다. 방송 출연ㆍ호텔 관리ㆍ음식점 모델 등 일의 종류는 다양하다. 매년 한 차례 고양시에서 주최하는 대회가 있고, 종종 비정규 대회가 열린다. 오는 10월에는 김일 타계 8주년을 맞아 그의 고향인 전남 고흥에서 국제대회가 열린다. 이왕표 선수는 “대회 입장 수입을 통해 프로레슬링이 자생할 수 있는 길을 트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강승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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