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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 빠진 진천 백곡마을 7080 어르신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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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아이구, 답답혀 죽것네. 그게 아니라니께. 여기선 땅바닥을 치면서 대사를 해야지유~.”

 “아, 엊그제까지 외웠는데 까먹었슈.”

 “근데 범철이는 왜 안 오능겨.”

 “추석 밑이라 벌초하러 갔댜.”

노인연극 ‘백곡아리랑’ 연출자와 배우들이 지난 1일 1시간 동안 연극 연습을 마친 뒤 어깨동무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아래 중앙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홍태 할아버지, 전미자 할머니, 이범철 할아버지, 샘 헤이터, 원정숙씨, 채희정씨, 이리호 할머니, 유방열 할아버지, 이주순 할머니. [프리랜서 김성태]

 1일 오후 충북 진천군 백곡면 물안뜰마을의 문화센터. 여느 때 같으면 조용할 실내가 떠들썩했다. 11월 1일 첫 연극 공연을 앞둔 70~80대 ‘어르신 극단’이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이날은 처음으로 공연 의상(한복)을 입고 연습하는 날. 젊은이 역할을 맡은 할아버지가 거울 앞에서 검은 머리 가발을 쓰더니 돌아보며 말했다. “워뗘, 젊어 보여?”

 백곡마을 어르신 극단은 지난 6월 결성됐다. 올 3월 마을에서 열렸던 음악회가 계기였다. 음악회를 준비했던 문화기획자 채희정(38·여)씨가 노인회장 유방열(82) 할아버지에게 “연극을 해보시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배우가 되고 싶어 예술대학에 입학했다가 “3대 독자가 광대짓하게 놔둘 수 없다”는 집안의 반대로 중퇴했던 유 할아버지는 “꿈을 이룰 기회”라고 반겼다.

 채씨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캐나다 국적의 샘 헤이터(49)가 연출가로 합류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성우로 활동하던 헤이터는 2001년 캐나다로 건너가 작은 마을에서 극단을 이끌었고 캐나다에 귀화까지 했다. 그러다 “한국에서 마을 극단을 운영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지난해 충북 진천에 들어와 자리 잡았다.

 청주문화재단의 지원을 받고, 연극배우 원정숙(52·여)씨가 지도자로 가세해 틀을 갖췄다. 배우는 유 할아버지가 알음알음 캐스팅했다. ‘끼’가 엿보이던 어르신들을 모았다. 문화재 보수 일을 하면서도 ‘찰리 채플린’을 꿈꾸던 김홍태(74) 할아버지를 비롯해 이범철(71) 할아버지, 이주순(78)·이리호(74)·전미자(73) 할머니가 나섰다. 할머니 셋, 할아버지 셋으로 71세인 이범철 할아버지가 막내다.

 연극은 난이도를 고려해 ‘위자료’란 작품으로 정했다. 큰아들이 사망한 뒤 날아든 100만원밖에 안 되는 위자료를 놓고 벌어지는 가족 간의 갈등과 애정을 담은 연극이다. 작품명은 ‘백곡아리랑’으로 바꿨다.

연습 전에 덩실덩실 춤을 추며 몸을 푸는 어르신들.

 6월 캐스팅이 끝나고 7월에 대본 읽기, 8월에는 발성·표정·몸짓 연기를 배웠다. 발성 연습부터 쉽지 않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복식호흡을 해가며 “아- 아- 아” 소리를 몇 번 내고 나면 어김없이 이런 소리가 터졌다. “어지러워 못 하것슈. 그만해유.”

 연기도 처음엔 목석 수준이었다. 양반 기침을 하라고 각본에 ‘에헴, 에헴’이라고 써 있는 것을 또박또박 “에 헴 에 헴”이라고 읽었다. 호통치는 대목에선 “동네 형님인데 도저히 못 그러겠다”는 포기 선언(?)도 나왔다.

 대본 외우기는 더 어렵다. “A4 용지 13장짜리 대본이 꼬깃꼬깃해지고 군데군데 해어질 정도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지만 손에서 대본을 놓으면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고들 했다.

 넘지 못한 벽도 있다. 사투리다. 원래 대본은 표준어였다. 그런데 그게 되질 않았다. 연습할 때면 ‘대체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란 대사는 어김없이 “정신 있는겨, 없는겨”로, ‘그냥 놔두란 말이야’는 ‘아, 노란 말여’로 바뀌었다. 연출자·지도자들은 고민 끝에 표준어를 포기하고 충청도 사투리로 대본을 다시 썼다. 채희정씨는 “어르신들 말씀이 느려 어쩔 수 없이 40분짜리 연극이 한 시간 분량으로 늘어나게 됐다”고 말했다.

 7~8월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연습했고, 이달 들어서는 주 3회로 늘었다. 어려움이 많지만 열정은 뜨겁다. 조상 묘소 벌초를 빼먹는 것처럼 마을에서 손가락질 받을 일만 아니라면 늘 전원 출석이다. 이주순 할머니는 “스무 살에 시집와 농사만 짓고 살았다”며 “연극 연습을 하면서 생각도, 몸도 젊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미자 할머니는 “창피해 자식들한테도 연극 연습을 한다는 말을 안 했는데, 이번 추석에 손주들 오면 실력을 보여주고 평가를 받아 볼 생각”이라고 했다.

 이리호 할머니는 “처음엔 연습하면 되겠거니 했는데 공연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오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르신 극단의 첫 연극은 토요일인 11월 1일 백곡초교 강당에서 무대에 오른다. 무료 공연으로 백곡면 주민뿐 아니라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진천=최종권 기자

노인 연극 준비 요령 다섯 가지

노인 연극 ‘백곡아리랑’을 준비한 문화기획자 채희정(38·여)씨는 “어르신들이 출연하는 연극을 꾸미다 보니 새로이 배운 게 있다”고 말한다. 다음은 그가 말하는 노인 연극 준비 요령이다.

 ① 대사는 한 번에 두 문장을 넘기지 않아야 한다. 짧고 간결하게, 그리고 감탄사를 많이 넣어야 표정과 몸짓에 집중할 수 있다.

 ② 대사 못 외운다고 채근하지 말아야 한다. 굳이 대본과 똑같은 대사를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 때론 자연스러운 애드리브를 통해 대본보다 더 좋은 대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르신들의 연륜을 믿어 보자.

 ③ 사투리는 그대로 살릴 것. 평생 써 온 사투리를 몇 달 만에 바꿀 수는 없다. 그럼에도 표준말을 고집하면 연기만 어색해진다.

 ④ 연습을 시작하기 전에 서로 포옹해 보자. 시골 어르신들은 의외로 가슴을 맞대고 따뜻하게 안아본 적이 없다. 포옹해 보면 긴장이 풀어지고 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연습에 임하게 된다.

 ⑤ 근력이 약한 노인들은 복식호흡이 잘 되지 않아 발성이 어렵다. 앉았다 일어서기 등 가벼운 하체운동과 복근운동을 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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