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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대맛 라이벌] (24) 떡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추석엔 온 가족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느라 되레 식당은 한산해지기 마련인데요. 유독 북적이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떡집입니다. 추석을 앞두고 떡집을 소개합니다. 한 곳은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전통 떡집이고, 다른 한 곳은 새로운 식재료와 도구를 활용해 떡을 새롭게 해석한 떡 카페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인절미, 노태우 대통령은 백설기 좋아했죠”

3대 이광순 사장이 인절미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있다(왼쪽). 낙원떡집을 소개한 옛 신문들. 10년 전 길 하나 건너로 이전한 낙원떡집 모습(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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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3월 26일, 노태우 대통령 12월 4일. 역대 대통령 생일을 다 외우죠. 해마다 우리집에서 맞췄으니까요. 대통령마다 좋아하는 떡이 달라요. 김대중 대통령은 인절미를, 노태우 대통령은 백설기를 좋아했어요. 이승만 대통령 시절엔 아드님이, 김영삼 대통령 재임시엔 큰 며느님이 직접 와서 가져갔죠.”

 낙원동 낙원떡집 3대 사장인 이광순(71·여)씨는 역대 대통령의 생일과 이들이 좋아하는 떡을 꿰고 있었다. 일부러 외운 게 아니다. 청와대에서 해마다 떡을 주문하니 자연스럽게 외워졌단다. 허풍이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까지 지난 60여 년간 청와대는 낙원떡집에서 떡을 주문했다. 이 사장 남편인 김정귀(73)씨는 “‘여기 효자동입니다’라고 시작하는 전화는 틀림없이 청와대에서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엔 주문 전화를 못받았다”며 “언젠가 전화가 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을 기념해 청와대·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당직자들에게 선물한 낙원떡집 떡상자.

대통령 생일만이 아니다. 청와대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낙원떡집이 도맡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러시아 모스크바에 다녀온 후 서울 시내 통반장을 청와대에 불러 설명회를 하고는 기념으로 나눠준 떡이나, 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념으로 청와대 직원과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당직자에게 감사 인사로 돌린 떡 등을 모두 만들었다.

 단골은 대통령말고도 훨씬 많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같은 유명 정치인이나 송해·황정순 등 원로 연예인까지 다양하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아내인 고 변중석 여사도 살아생전 단골 중의 단골이었다. 이 사장은 “현대가(家)에는 아예 떡 차가 있었다”며 “변 여사님이 한 말씩 인절미나 시루떡을 맞춰 차에 싣고는 전국 사찰에 불공드리러 다니셨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하기도 했다. 1966년 6월 공릉 태릉선수촌 개관식 자리에도, 또 여의도 LG 쌍둥이빌딩 기공식 고사 때도 낙원떡집 떡이 놓여 있었다.

 낙원떡집 역사는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대 고이뽀(59년 작고·여)씨가 19년 낙원시장(현 낙원상가 자리)에 떡집을 차린 후 96년째 한결같이 떡을 만들고 있다. 현재의 이 사장은 외조모 고씨, 어머니 김인동(91·고씨의 넷째딸)씨에 이어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2005년엔 이 사장 아들 김승모(45)씨가 인사동에 같은 상호의 떡집을 내면서 낙원떡집 역사는 4대째 이어지고 있다.

 이 사장이 본격적으로 떡집을 맡은 건 80년 10월이다. 어머니 김씨가 다른 자녀들이 살고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떠나면서 맏딸인 이 사장에게 가게를 맡겼다. 사실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자연스럽게 떡 만드는 법을 배워왔기 때문이다.

 “일부러 배우려고 배운 게 아니었죠. 어릴 때부터 그냥 저절로 배웠어요. 학교 끝나고 오면 엄마를 도왔어야 했으니까요. 직장 다닐 때도 일 끝나고 오면 집에 와서 엄마를 도왔어요.”

 전부터 유명세를 타고 있긴 했지만 이 사장이 본격적으로 맡은 80년대에 낙원떡집의 전성기가 열렸다. 처음 떡집을 맡았을 때 회사에 다니던 남편 김씨는 장사가 너무 잘돼 일손이 부족해지자 회사를 그만두고 떡집에 매달렸다. 김씨는 “떡 사러 오는 사람들 줄이 가게 밖 50m까지 길게 늘어설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나마 떡을 사면 다행이었다. 오전 3~4시에 만든 떡은 낮 12시면 다 팔렸기 때문이다. 추석 같은 명절을 앞두고선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방송국에서 찾아와 생방송을 할 정도였다. 당시 이 사장이 살던 낙원아파트에 방송국 중계차가 7대씩이나 와서 대기했단다.

 “80년대엔 경기가 좋았고 떡도 잘 팔렸죠. 정말 장사가 잘됐어요. 너무 피곤해서 돈 세는 것도 귀찮을 지경이었어요. 누가 돈 좀 집어가도 몰랐을 정도였어요. 그저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죠. 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까지도 솔직히 우리집은 괜찮았어요.”

  너무 바빠 삼남매 키우면서 학교에 한번 못갔다. 학교에 가기는커녕 도시락도 못챙겨줬다. 이 사장은 “아침에 등교할 땐 ‘12시에 도시락 갖다줄게’라고 말하는데 정신 차리고 보면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딸 대학 졸업식에 가서도 사진 한 장만 찍고 바로 돌아와 떡을 만들었다. 매일 주문이 몰리니 가게를 맡은 후 지금까지 34년 동안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다. 그런데 왜 계속 낙원동에 머무르고 있을까.

 이 사장은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입점 제안을 받았지만 백화점 유통 마진을 생각하니 품질을 유지할 자신이 없어 거절했다”고 말했다. 전국에 낙원떡집이라는 간판을 내건 떡집이 우후죽순 생겼지만 최근 아들이 인사동에 낸 집 빼고는 모두 원조 낙원떡집이 아니다.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다른 동네 낙원떡집에 주문하고는 낙원동으로 떡 찾으러 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외환위기까지도 거뜬히 넘겼지만 정작 위기는 2000년대 들어서 찾아왔다. 떡 수요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결혼식이나 아이 백일, 돌 때면 무조건 떡을 맞췄지만 이젠 뷔페 같은 데서 행사를 하니 떡 맞추는 사람들이 크게 줄었어요. 뷔페 가면 다 있는데 뭐하러 떡을 하겠어요.”

 떡을 즐겨 찾던 강북 부자들이 강남으로 대거 이사한 것도 손님이 줄어든 이유 중 하나다. 낙원떡집 떡을 즐겨 찾던 가회동 등 강북 부자들이 압구정동 등으로 많이 이사를 갔다고 한다. 몇몇은 강 넘어 떡 사러 오기도 했지만 그걸론 부족했다.

 이 사장은 “부자 따라 강남으로 옮기라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며 “왜 강남에 가야하느냐”고 되물었다.

 “사실 애들 교육 때문에 강남에서 20년 가까이 살았어요. 그런데 난 강북이 좋더라고요. 특히 우리 가게는 역사가 있잖아요. 낙원떡집이라도 이곳을 지켜야죠.”

 옛 자리는 고집하지만 떡 종류는 30여 개에서 40여 개로 다양해졌고, 잘 팔리는 떡도 달라졌다. 80년대엔 백편·꿀편·시금치편 등이 잘 팔렸단다. 특히 부잣집 환갑잔치나 결혼식 때는 시금치편이 빠지지 않았다. 시금치편이란 쌀가루와 시금치가루를 넣고 그 위에 밤·대추를 채썰어 얹은 후 쪄 내는 것인데, 모든 일이 편안하길 바라는 뜻이 담겨있다. 하지만 잔칫날 떡 맞추는 사람이 줄자 요즘은 아예 팔지 않는다.

낙원떡집은 경단·설기·두텁떡·약밥 등 예부터 즐겨 먹던 전통 떡을 주로 판매한다. 이 사장은 “떡은 옛날 떡이 진짜 맛있는 떡”이라고 말했다.

 인절미·바람떡·백설기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잘 팔리는 전통떡이다. 요즘은 아침 식사 대용으로 쑥인절미가 인기다. 6년 전 한 개씩 개별 포장해 판 이후 찾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10~20개씩 냉동실에 넣어뒀다가 아침에 미리 꺼내 30분만 자연 해동하면 처음 맛 그대로라 식사 대용으로 찾는 손님이 많다고 한다.

 100년 가까운 시간. 변하지 않은 건 ‘가장 좋은 재료를 사용하라’는 원칙이다. 제주도 한라산에서 나는 쑥을 독점으로 계약재배해 사용하고 여주쌀만 고집하는 것도 외할머니부터 이어져 온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 사장은 떡집이 점점 사라지는 것도, 또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전통이 퇴색하는 것도 다 불편하다고 했다.

 “요즘 떡이 고급화했다고 하는데 사실 색만 알록달록해졌어요. 어떤 떡은 떡인지 빵인지 모르겠어요. 떡은 왜 다른 디저트와 달리 발전하지 않느냐는 사람이 있는데 전 생각이 달라요. 떡은 전통이 중요해요. 옛날 방식 그대로 손으로 만드는 게 진짜 맛있는 떡이예요. 기계로 하면 옛맛을 낼 수가 없거든요. 사람들이 떡을 안 찾는 것도 아쉽지만 옛날 그 맛을 못내는 떡집들도 반성해야 합니다. 나이가 드니 시간이 가는 게 아쉽네요. 계속 명품떡을 만들고 싶은데 말이죠.”

찰떡에 아메리카노를 허하라

맛은 기본, 보이는 차림새까지 신경쓴다. 따로 주문 제작한 그릇에 대표 메뉴를 담았다. 위는 개성주악·오색송편·방울증편, 아래는 구움찰떡.

“떡이라고 베이킹파우더 넣지 말란 법이 있나요. 전엔 떡 만들 때 막걸리를 넣기도 했잖아요. 이러이러한 식으로 만들어야만 떡이라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어요. 다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좋은 건 받아들여야죠. 그래야 발전할 수 있어요.”

 오숙경(46·여) 담장옆에국화꽃(이하 담꽃) 대표는 구움찰떡을 반죽하며 말을 이었다. 구움찰떡은 찹쌀가루·쑥가루·밤·호두·완두콩 등을 넣은 후 마지막에 베이킹파우더를 약간 넣어 함께 섞는다. 이걸 적당한 크기로 떼내 오븐에 구우면 완성이다. 베이킹파우더나 오븐 모두 전통 떡 만들 때 사용하지 않지만 오 대표는 꼭 필요하단다. 떡 식감을 바삭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 물 대신 우유를 넣어 반죽한다. 풍미를 고소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① 구움찰떡을 반죽하는 모습. 전통적 떡 조리법과 달리 베이킹파우더와 우유 등을 넣는다. ② 포장도 한 개씩 먹기 좋은 크기로 한다. ③ 전통 떡집과 달리 커피와 떡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카페로 꾸몄다.

 오 대표가 떡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건 2005년. 이전에는 자녀에게 간식 챙겨주려고 문화센터 등에서 간단한 빵과 떡 만드는 법을 배웠다.

 “쉬폰 케이크 만들면서 빵에 대해 회의를 느꼈어요. 기름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거예요. 반면 떡은 정말 솔직하더라고요. 물·소금·설탕만 넣어요. 색도 단호박·자색고구마 같은 자연 재료로 내고요. 매력있더라고요.” 카페를 낼까 고민하다 기왕이면 떡을 배워서 한데 엮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종로의 전통병과원에서 1년 동안 일주일에 2번씩 전통떡 만드는 법을 배웠다. 수업 없는 날엔 바리스타 이정기(한국바리스타협회장)씨에게 커피를 배웠다.

 “당시엔 떡 카페가 없었어요. 집에서 떡 먹을 때 꼭 전통차랑 먹는 건 아니잖아요. 커피랑 편안하게 먹잖아요. 잘 차려진 카페에서 그렇게 먹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죠.”

 오 대표는 2006년 신사동 가로수길 미래산부인과 안쪽 골목에 이름도 생소한 떡 카페 ‘담장옆에국화꽃’을 열었다. 구움찰떡·인절미구이·경단·시루떡·설기와 핸드드립 커피를 팔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하루 14시간을 일했는데 딱 두 테이블만 찼던 날도 있어요. 매달 손해가 나서 사비로 메웠어요. 아마 떡은 커피랑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버텼다. 1년쯤 지나자 조금씩 손님이 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장사가 잘되진 않았다. 가로수길 매장은 주방이 좁아 떡을 만들기 불편한 데다 인테리어도 프랜차이즈 식당처럼 뭔가 판에 박힌 느낌이라 별로였다. 2008년 가게를 서래마을로 옮겼다.

 “그 즈음 가로수길 임대료와 권리금이 크게 올랐어요. 서래마을은 그렇게까지 비싸지도 않은데다 집에서 가깝기도 했어요. 마침 자리가 났는데 마음에 들더라고요. 서래마을이라고 꼭 프렌치 레스토랑만 있으란 법이 있느냐고 호기를 부렸죠.”

 하지만 여전히 수입은 기대에 못 미쳤다. 꼬박 1년을 더 고전했다. 그래도 접지 않은 건 단골 손님들 응원 덕분이다. 가로수길에 있을 때부터 찾아온 한 중년 남성은 올 때마다 “담꽃은 잘될겁니다. 잘하고 있으니까요”라고 힘을 북돋워줬다. 그러다 국산 팥으로 만든 팥빙수와 단팥죽으로 소위 ‘대박’을 쳤다. 빙수와 단팥죽 먹으러 왔던 사람들이 떡도 맛봤고, 이때부터 떡도 유명세를 탔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백화점이 수수료를 낮춰주겠다며 입점을 제의하기도 했다.

 “담꽃은 단순히 떡 파는 떡집이 아니예요. 한국식 디저트인 떡을 차와 즐길 수 있는 캐주얼한 공간이죠. 그래서 인테리어 하나, 소품 하나까지 신경쓰는 거예요. 그런데 백화점은 떡만 쭉 나열해 팔기를 원하더라고요. 서로 원하는 게 달라요. 게다가 우리는 떡을 소량만 만들고 대부분 예약판매 하거든요. 입점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입니다. “

 지난해 7월 맛집이 몰려드는 한남동에 새 매장을 열었다. 왜 한남동일까. “요즘 가장 ‘핫’한 곳에서 인정받고 싶었다”고 답했다. 한남동에도 손님이 많지만 외국에서 온 화려한 디저트가 등장할 때마다 위협을 느낀다고 한다.

 “외국의 화려한 디저트에 비해 떡은 색깔이나 모양이 소박하잖아요. 사람들이 떡 같은 한국 디저트를 외면할까 걱정돼요.”

 오 대표는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좋은 재료를 쓰고 위생에 각별히 신경쓰는 것. 또 버리는 한이 있어도 고객에게는 제대로 된 음식만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송편을 만들었는데 소가 적게 들어갔다싶으면 그 떡은 버린다. 그날 팔고 남은 떡도 마찬가지 신세다.

 “떡은 유통기한이 딱 하루에요. 남으면 버렸어요. 직원이라도 매장 안에서는 먹을 수 있지만 밖으론 못 가져가게 했어요. 정성 들여 만든 떡을 혹시 쉽게 생각하게 될까봐요. 2년 전부터는 푸드뱅크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오 대표는 떡 만드는 것만큼이나 떡을 담아내는 모양새나 포장법에도 신경쓴다. 그릇도 직접 맞췄다. 일종의 고급화 전략이다. 그는 “우리 떡이 고급스럽고 맛있어 보이려면 맛만 좋게 해서는 안되고 멋이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장을 할 때도 조그맣게, 그러나 잘 보이게 싼다.

 담꽃은 이젠 한국식 디저트의 리더로 꼽힌다. 그러나 오 대표는 여전히 긴장을 놓치 않는다. 그는 담꽃의 경쟁자는 단순히 떡집이나 디저트 가게가 아니라 ‘맛있는 요리를 하는 모든 가게’란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소문난 맛집에 가서 먹어보고 직원 서비스도 눈여겨 본다.

 “앞으로의 바람은 한국식 디저트가 제대로 자리잡는 거예요. 물론 비싼 돈 주고 먹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제대로 해야겠죠. 담꽃이 그런 역할을 주도적으로 했다고 평가받고 싶습니다.”

글=송정 기자 asitwer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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