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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세에 주연 여배우 … 복지관 무대서 '어르신 스타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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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정오(73·왼쪽 사진)씨가 서울 마포구 우리마포복지관에서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그는 경로당에서 ‘김화백’으로 불린다. 오른쪽 사진은 서울 서대문 노인복지관에서 차영숙(63·여)씨가 연극 연습을 하는 모습이다. 차씨는 “프로무대에서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갈 것”이라고 말한다. [강정현 기자], [사진 우리마포복지관]

차영숙(63·여·서울 동작구)씨는 지난해 연극무대에 섰다. 서울 서대문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상연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에 주연 여배우로 열연했다. 서대문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연극공부를 한 지 3년 만이다. 처음엔 ‘복지관 연극이 별거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역 감독이 발성부터 걸음걸이까지 제대로 가르쳐 줬다. 공연을 본 남편은 차씨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하고 싶은 걸 참고 살림만 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아들은 엄마를 부를 때 아예 “배우!”라고 한다.

 4일 오후 차씨는 복지관 3층 강당에서 동료 13명과 연기 연습에 한창이었다. 11월 ‘부모님 전상서’ 공연을 앞두고서다. 친정어머니와 헤어지는 장면에서 윤여성(62) 예술감독이 차씨에게 “더 애틋하게 감정을 끌어내라”고 주문했다. 차씨가 “어머니”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윤 감독은 “차씨의 재능에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젊어서 연기를 시작했으면 틀림없이 스타 배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충북 음성군의 심종화(63·여)씨는 어릴 적에 시인 서정주·유치환의 시를 애송한 문학소녀였다.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30여 년간 전업주부로 살면서 문학의 꿈은 접었다. 가끔 라디오 프로그램에 청취자 사연을 보내 글쓰기 갈증을 채웠다. 올해 한 문예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꿈이 이뤄졌다. 시작은 노인복지관이었다. 귀농한 집 근처 노인복지관에 ‘시 치유반’ 수업이 있었다. 일주일에 1회, 1시간30분씩 시작(詩作) 수업을 들었다. 습작이 250편을 넘었다. 세 번 도전한 끝에 한 노인복지관이 주관한 ‘전국 어르신 문학작품 공모전’에서 대상(보건복지부장관상)을 받았다. 심씨는 “내가 진짜 시인이 된다는 건 상상도 못했는데…”라며 감격스러워했다. 그는 올해 안에 시집을 출간할 계획이다.

 전국 노인복지관이 6074(60~74세)에게 ‘꿈의 산실(産室)’이 됐다.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집에서 가깝고, 수업료가 비싸지 않아 6074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 보건복지부 정윤순 노인정책과장은 “노인복지관은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복지 인프라”라며 “어르신들의 꿈을 실현해 주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소개했다. 이웃 일본에도 이런 인프라가 없다. 미국이나 유럽에 ‘시니어(senior)센터’가 있지만 사교모임 성격이 강하고 규모가 작다.

 6074가 100세 시대를 준비하려면 은퇴한 뒤 재교육을 비롯한 평생교육이 중요하다. 복지관이 ‘평생교육의 메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2년 10월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705명을 분석했더니 45.8%가 노인복지관을 이용하고 있었다. 노인복지관은 2008년 228곳에서 지난해 317곳으로 늘었다.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 김도훈 사무총장은 “노인복지관은 건강과 평생학습, 여가와 자원봉사 등 서비스를 포괄적으로 제공한다”고 말했다.

7월 말 치매환자 위문공연을 하기 직전에 최경숙(64·여·앞줄 왼쪽에서 넷째)씨를 비롯한 12명의 연주자가 만돌린의 음을 맞추고 있다. 최씨는 “원래 자주 아팠는데 3년 전 만돌린을 배우면서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다”고 말했다. [사진 시립강동노인종합복지관]

 최경숙(64·여·서울 강동구)씨는 3년 전 만돌린(기타와 비슷한 이탈리아 전통악기)의 애잔한 선율에 반했다. ‘섬집 아기’를 작곡한 고(故) 이흥렬씨에게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운 기억이 떠오르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났다. “원래 악기 연주하는 걸 참 좋아했는데…. 아이 키우느라 일하느라 기회가 없었어요.” 최씨는 시립강동노인종합복지관에서 만돌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위 캔(We can) 시니어 예술봉사대’ 단원이다. 한 달에 한두 차례 병원·교회에서 공연을 한다. 최씨는 “이젠 객석에 미소를 보낼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노인종합복지관에는 동영상을 배우는 UCC(사용자제작콘텐트)반이 있다. 방송 일에 관심이 많았던 안태훈(71·서울 용산구)씨는 이곳에서 방송 촬영·편집·취재·기사작성법을 배웠다. 동기들과 앵커·취재기자·촬영기자로 역할을 나눠 정기적으로 뉴스를 제작한다. 용산청춘방송의 영문 약자를 따서 ‘YCB 정오뉴스’라고 이름 붙였다. 서울 한남역 열차 정차사고의 문제점 같은 고발 뉴스, 귀농 준비, 여행 정보 등을 10여 분 내보낸다.

 우리마포복지관에서 수채화를 배우는 김정오(73)씨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배우면 눈치 보이는데 여기에선 서로 잘했다고 박수를 크게 쳐 주니 힘이 난다”고 말했다.

 노인복지관은 진화하고 있다. 스마트폰·컴퓨터·사진·동영상, 캘리그래피(calligraphy·손으로 그린 그림문자) 화가, 실버 모델같이 젊어진 6074의 취향을 반영한 수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또 봉사 활동의 산실 역할을 한다. 용산노인종합복지관 박준기 관장은 “배워서 만족을 얻는 데서 나아가 자원봉사를 통해 남에게 베풀 때 진정한 자아가 실현된다는 사실을 어르신들이 알게 됐다”고 말했다.

 꿈을 키우는 6074들은 노후 준비가 비교적 잘돼 있는 경우가 많다. ‘연극배우’ 차영숙씨는 8년 전 퇴직한 남편의 공무원연금으로 생계를 꾸린다. 아들딸이 출가해 연금으로 부부가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한다.

◆특별취재팀=신성식 선임기자, 박현영·장주영·김혜미 기자, 도쿄=이정헌 특파원, 김호정(중앙대 광고홍보학과)·이하은(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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