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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광주비엔날레 개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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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3시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앞마당. 상복 차림에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노인들이 버스에서 천천히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광주 오월 어머니들이 이들의 손을 잡았다. 함께 컨테이너 앞으로 이동해 추모제를 지냈다. 경북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발굴된 유해는 6ㆍ25 때 희생된 민간인들의 것으로, 컨테이너 든 채 방치돼 있었다. 유족들은 이날 컨테이너와 함께 광주로 4시간을 이동해 왔다. 함께 절을 하며 유족들은 더러 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닦았다. 6ㆍ25의 비극과 광주의 비극이 만났다. 임민욱의 광주 비엔날레 개막 퍼포먼스 ‘내비게이션 아이디’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인간성의 근본이라는 취지에서, 묻힐 땅도 없이 반세기를 떠돈 원혼을 위무하는 행위다.

임씨는 “고통을 환대하고 나누는 여정으로, 또 다른 종착지이자 출발지. 서울보다 먼 육상 거리가 말해주듯 영호남의 거리감 해소가 가장 어려웠다”고 말했다. 경산코발트광산 유족회 박의원(72) 대표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던 부모님의 억울한 희생이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고 말했다.

종일 내린 비로 촉촉해진 전시관 앞마당에는 미국 작가 스털링 루비가 설치한 대형 스토브 두 대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전시장 외벽엔 불난 집에서 탈출하는 커다란 문어가 이 모든 장면을 지켜봤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 대표 작가였던 제레미 델러의 작품이다.

20돌을 맞은 광주비엔날레가 5일부터 11월 9일까지 66일간 열린다. ‘터전을 불태우라(Burning down the house)’는 도발적 주제를 내걸고 광주비엔날레 전시관과 중외공원 일대에 38개국 111명(103개팀)의 413점을 전시한다. 이 중 신작은 39점이다. 주제는 1980년대 미국 펑크록 그룹 토킹 헤즈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다. 총감독 제시카 모건(46, 영국 테이트 모던 수석 큐레이터)은 “한국은 미래지향적인 나라로, 급성장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터전을 불태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구축하기 위해 기존의 것을 불태우는 행위다. 물질이 타고 나면 다른 것으로 변한다”고 설명했다.

작품 중에는 우리의 터전에 대한 직설이 많았다. 김성환의 영상 ‘게이조의 여름-1937년의 기록’은 스웨덴의 동물학자이자 여행가인 스텐 베리만(1895~1975)이 남긴 ‘경성(게이조) 여행기’(1937년)에 기초한 허구적 다큐 영상이다. 일제강점기 서울을 여행한 외국인의 내레이션이 흐르는 가운데 현재의 서울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달라졌는지 자문한다. 미국 미술가 샤론 헤이즈의 ‘우리는 이 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는 지난해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운동이 시작된 고려대에서 ‘세상은 누군가의 노동으로 돌아갑니다’ ‘나는 이제 물러날 수 없습니다’ 같은 문구를 적은 걸게 현수막을 드리우는 영상이다.

전시장에서는 소주를 마시거나, 이름을 남길 수 있다. 터키 미술가 바누 제네토글루의 설치 ‘아니면 그들이 모두 유령이었던가?/ 영혼의 도서관Ⅱ’은 가설 소주바(매주 토요일 저녁 개방)다. 그는 한국 전역을 여행하며 소주 제조업자들을 만나 소주를 수집해 전시장에 설치했다. ‘세월호 진상규명주’도 있었다. 슬로바키아 작가 로만 온닥의 ‘시계태엽장치’가 설치된 방에서는 안내원이 시간과 이름을 묻고, 이를 전시장 벽에 기록한다.

◇기획ㆍ연출ㆍ주제의 통일성 돋보여=전시장 안팎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듯한 벽지(엘 울티모 그리토), 숯 설치(코넬리아 파커), 집 모양 구조물(우르스 피셔)과 아파트 창문(레나테 루카스) 등 터전과 불에 대한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유진상 2012 미디어시티 서울 총감독(계원예대 교수)은 “수많은 작품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엔날레는 산만해지기 쉬운데 시의적절한 주제, 이를 일관되게 드러낸 기획과 연출의 통일성이 돋보였다. 오히려 비엔날레에서 기대되는 파격ㆍ공격성ㆍ도발이 덜 부각되는 정제된 전시로 보였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개막 전 열린 20주년 특별전에서는 홍성담의 대통령 풍자화의 전시불허를 둘러싼 해프닝이 있었다. 이용우 광주비엔날레 대표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 의사를 밝혔으며 12일 퇴임식을 앞두고 있다. 그는 개막 기자회견에서 “올해 주제는 ‘터전을 불태우라’인데 본의 아니게 빨리 불탔다”며 “광주 비엔날레는 20년간 현대미술을 전시한 데서 나아가 사회와 정치ㆍ문화ㆍ인류학적 담론을 담았다. 다양한 토론을 생산하는 플랫폼이 돼 왔고, 앞으로도 그러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리의 터전은 어떤 곳인가. 불태워야할 것은 무엇이며, 그 과정에서 잃는 것은 또 무엇을까. 타고 남은 자리는 어떻게 변할까.

입장료 성인 1만4000원, 만4∼12세 4000원. 062-608-4114.

광주광역시=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사진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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