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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법치 뒤흔드는 판사들의 막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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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전영선 기자 중앙일보 팀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전영선
사회부문 기자

“웬만하면 다시는 법원에 오지 말아야겠구나.”

 크든 작든 송사에 휘말려 본 사람이 반드시 하게 되는 말이다. 생소한 법률용어들에 바보가 된 듯한 기분 때문만은 아니다. 재판 절차 하나를 밟을 때마다 역경의 연속이다. 상대방과 수없이 얼굴을 붉혀야 하고 속이 터져라 억울할 때도 있다. 둘도 없는 친구가 원수로 돌변하고 가족이 남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들, 어쩔 수 없이 법정에 서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사뭇 비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법정의 절대자인 판사의 말 한마디가 갖는 위력은 무시무시하다. 조금이라도 한쪽으로 기운 낌새만 보여도 절망하게 된다. 그런데 판사가 막말을 내뱉는다면….

 대법원이 새누리당 이한성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지난 4월까지 “판사가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제기된 진정·청원은 69건에 달했다. 이 중 징계조치가 취해진 것은 2건에 그쳤다. 지난해 60대 여성 증인을 신문하던 중 “늙으면 죽어야 해요”라고 말해 논란 끝에 사임한 판사가 받은 견책 처분 1건과 서면 경고 1건이 전부다. 나머지 67건에 대해선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제출 자료에 대해 대법원은 “진정 내용은 진정인의 일방적인 주장을 정리한 것으로 객관적인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진정 중엔 분명 맥락을 살펴봐야 할 내용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과연 법원에 허위로 이런 진정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심한 발언이 많다.

 2012년 대전지법에선 판사가 원고에게 “칠십이 넘어서 소송하는 사람은 3년을 못 넘기고 죽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 지방 법원 판사는 다섯 살 아이가 개에게 뺨을 물린 사건의 민사재판 도중 “애도 잘못이 있네. 왜 개한테 물리느냐”고 질책했다. 서울 지역 법원에선 장애인증을 제출하며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하자 특정 회사 이름을 거론하며 “이 회사엔 이런 사람밖에 없느냐”고 되물은 경우도 있었다. “돈 1000만원을 가지고 하릴없이 소송하느냐” “여자가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았지”라는 말까지 나왔다.

 법원이 판사의 막말을 대수롭지 않게 처리한 것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재판에 임하는 판사들까지 욕되게 하는 일이다. 진정을 제기한 민원인은 처리 결과를 보고 다시 한번 법치에 대한 신뢰를 접었을 것이다. 법정은 신성한 장소다. 누군가의 삶이 달린 사안을 두고 판사의 판단에 승복하기로 다짐하고 서는 심판대이기 때문이다. 재판장이 법정에 들어설 때 모두가 기립하며 이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그 약속 안에 판사의 막말은 들어있지 않다.

전영선 사회부문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