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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당신의 옷 속에 숨은 경영의 비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한동안 회자됐던 한 아파트의 이 광고 카피 문구가 이젠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입은 옷이 당신 직장을 말해준다’고 말입니다.

 최고경영자(CEO)뿐 아니라 직원 옷차림 역시 기업 이미지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데 주목해 기업 DNA에 걸맞는 드레스 코드를 정하는 회사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추구하는 비전을 직원 근무복에 담아 고객에게 이를 자연스럽게 각인시키겠다는 의도죠.

 이같은 패션 전략이 어느 단계까지 와 있으며, 또 얼마나 통하고 있는지 분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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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기업 직원이 평소 근무 복장을 입고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 맨 앞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태갑 롯데백화점 대리(구매팀), 홍경표 네이버 대리(홍보실), 송성욱 현대카드 사원(커리어개발팀), 윤지남 삼성전자 과장(커뮤니케이션팀), 송의준 신한은행 대리(홍보부).

잡스처럼 입어라
말단 직원까지 전부

점심시간 무렵인 오전 11시40분 강남역 신분당선 출구 주변.

강남대로를 경계로 거리 패션이 확 갈린다. 강남대로 아래편 강남역 7번 출구 부근엔 연한 색 면바지, 그리고 바지와 같은 색은 아니지만 잘 어울리는 색 재킷을 걸친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길 건너편 강남역 2번 출구 부근에선 통이 좁은 흰색이나 하늘색 바지에 화사한 핑크나 옐로우 등 파스텔톤 셔츠 차림을 한 남성이 많다. 몸 라인이 드러나는 하얀 셔츠에 딱 달라붙는 감색 양복바지를 입은 사람도 적잖이 눈에 띈다. 대로를 사이에 두고 옷차림이 이처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회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7번 출구 쪽엔 삼성전자, 2번 출구 쪽엔 미국 화장품회사 에스티 로더와 광고회사 이노션이 있다.

검정 터틀넥에 청바지, 뉴발란스 운동화. 애플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는 애플 컴퓨터와 아이폰만 만들어낸 게 아니다. 패션에서도 ‘잡스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그는 신제품 발표회 때마다 똑같은 스타일로 청중 앞에 나타났다. 점잖은 정장 차림으로만 대중 앞에 서온 다른 기업 최고경영자(CEO)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이런 잡스 스타일에 많은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CEO의 패션을 통해서도 대중에게 각인시키고 싶은 기업 이미지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잡스가 입은 건 청바지와 검정 스웨터였지만, 이를 통해 애플이 지향하는 혁신을 보여줬다는 얘기다. 동시에 다른 경쟁기업, 그러니까 늘 정장을 고수하는 CEO를 둔 회사들은 마치 고루한 고정관념에 묶여있는 것처럼 비춰지게 만들었다. 김근배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는 “상징이 실재를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며 “눈에 보이는 건 청바지를 입은 한 남성이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혁신’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인식했다”고 말했다.

“성공하는 기업은 드레스 코드가 있다”

남성복(반하트 디 알바자) 디자이너인 정두영 실장도 잡스 스타일을 “고도의 이미지 전략이 숨어있는 스타일”이라고 지적했다. 신경 쓰지 않은 듯 단순해 보이는 옷차림에 철저한 계산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잡스가 가진 날카로운 이미지에 깔끔한 느낌의 검정 스웨터와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청바지가 어우러지면서 세련되면서 친근감 있는 애플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는 얘기다. 이후 잡스 스타일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흔한 옷을 세련되게 입는다는 의미의 놈코어(normcore) 패션을 만들며,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물론 잡스 외에도 자신의 패션이 기업 이미지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의식한 경영진은 많다. 이건희 삼성 회장도 그중 하나다. 그는 2006년 뉴욕에서 열린 삼성전자 사장단 회의에서 “모든 것을 원점에서 보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창조적 경영에 나서달라”며 혁신과 창조경영을 화두로 던졌다. 당시 이 회장이 선택한 건 핑크색 재킷이었다. 이를 두고 틀을 깨는 옷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드러냈다는 평가가 많다. LG전자 조성진 사장도 지난달 프리미엄 가전 발표회장에서 분홍 재킷을 입었다.

이제는 최고 경영진뿐 아니라 직원의 패션까지 이런 역할을 해야한다고 여기는 기업이 점점 늘고 있다. 『성공하는 남자의 옷차림』이라는 책을 펴낸 대기업 이미지 컨설턴트인 존 T. 몰로이는 “성공하는 기업은 경영철학에 부합하는 드레스 코드가 있다”며 “직원 옷차림이 고객을 끌어들인다”고 했다. 옷차림이 고객을 상대할 때 중요한 이미지 전략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얘기다. 범상규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이 브랜드 이미지 구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직원 옷차림까지 관리하고 있다”며 “백화점 쇼핑백이 기업 이미지를 전달하는 채널로 활용되는 것처럼 직원 옷차림도 넓은 의미에서의 마케팅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카드가 발행한 『프라이드-현대카드가 일하는 방식 50』. 직원 근무복장에 대해 자세히 쓰고 있다.

직원의 옷차림이 기업 이미지에 직결된다는 걸 깨닫고 몸소 실천하는 대표적 인물이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이다. 그는 늘 몸에 딱 맞는 흰 셔츠를 즐겨 입고 넥타이는 매지 않는다. 바지는 통이 좁고 복숭아뼈까지만 오는 짧은 길이를 선호한다. 본인만이 아니라 직원에게도 이런 스타일을 권한다. 현대카드는 2012년 회사 매뉴얼을 담은 『프라이드-현대카드가 일하는 방식 50』이라는 책을 냈는데, 정 대표의 스타일을 그대로 현대카드 직원 드레스코드로 정했다. 실제로 현대카드 직원들은 몸에 붙는 셔츠에 짧은 바지를 입고 갈색 구두를 신는다. 남성 직장인의 유니폼이나 마찬가지인 ‘은갈치색 양복’을 입으면 이곳에선 상사의 조용한 부름을 받을 수도 있다. 자부심과 신뢰, 트렌드를 주도하는 현대카드 철학을 패션을 통해 드러낸다는 계산을 어그러뜨리기 때문이다.

‘현대카드스럽기 위한 노력’은 여름에 절정을 이룬다. 폭염기인 7월 중순부터 4주간은 ‘캐주얼 위크’(4월에 3주, 12월에 3주 더 있다)로, 이때만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 허용된다. 그러나 이 4주간 이외에는 아무리 더워도 예외 없이 긴팔 와이셔츠 차림을 고수해야 한다. 민운식 현대카드 홍보팀장은 “정장을 입는 건 금융회사에게 필요한 신뢰와 전문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며 “여름이라고 반팔을 입는 건 현대카드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여름에 여의도 현대카드 사옥 로비에 가면 한눈에 누가 직원인지, 누가 방문객인지 누구라도 금세 구분이 가능할 정도다.

다른 금융기관도 직원 옷차림을 대 고객 이미지 전략의 하나로 활용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2007년부터 여름이면 늘 입던 쿨비즈 룩을 올해부터 바꿨다. 그동안은 깃이 달린 반팔 티셔츠를 유니폼으로 제작해 직원에게 입도록 나눠줬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각자 흰색 반팔 와이셔츠를 골라 입는다. 올 초 카드사 고객 정보 유출 사태 등으로 손상된 금융권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티셔츠보다는 아무래도 와이셔츠가 더 적합하다는 판단에서다.

대기업서 청바지까지 등장

유통업계에서 보수적 기업으로 통하던 롯데백화점도 변화의 물결 한복판에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검정색 정장이 대세였다. 하지만 지금은 보라색 재킷도 그다지 튀는 색이 아니다. 정장 차림의 40~50대 임원도 구두가 보일 정도의 짧은 길이에 밑단을 접어 모양을 낸 ‘카브라’ 있는 바지를 입고 다닌다. 나재웅 롯데백화점 홍보팀 대리는 “출근 의상으로 청바지까지 등장했다”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라고 말했다.

각 기업의 패션 전략은 창의성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지난해 9월 화성에 있는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는 ‘저돌적 이미지’로 보이는 파란색 점퍼를 없앴다. 정몽구 회장이 강조하는 ‘창조 마인드’를 갖추기 위해선 옷부터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과거 제조업 중심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일을 하는 데에 가치를 부여했지만 이제는 각자 개성을 살리며 창의적 아이디어를 내는 게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창조적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으므로 개성을 죽이는 유니폼을 벗어 던지자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각 기업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2008년 삼성이 최초로 도입한 비즈니스 캐주얼이 화이트칼라의 출근복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도입 초기만 해도 아래 위 같은 색 정장에 그저 넥타이만 푼 어정쩡한 차림새가 많았지만 이제 다양한 색과 형태의 옷을 어색하지 않게 갖춰 입는 세련된 옷차림으로 진화하고 있다.

삼성전자 블로그 ‘삼성 투모로우’에 게시된 ‘삼성 맨들이 입는 비즈니스 캐주얼’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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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엔 패션 트렌드 선두에 선 임원도 많다. 이지현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데님 셔츠에 통 좁고 짧은 회색 정장바지, 스니커즈 운동화 차림의 50대 중반 삼성전자 임원을 만난 적이 있다”며 “삼성전자라고 하면 격식에 얽매여 있을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이 임원 복장을 보면서 회사 분위기가 전과 상당히 달라졌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특히 윤부근 삼성전자 소비자가전사업부 사장은 평소 스타일에 관심이 많은 CEO로 알려져 있다. 그는 통 넓은 아저씨 스타일 양복을 입은 임원들을 볼 때마다 대놓고 “통 좁은 바지로 스타일을 바꿔보라”고 조언할 정도다. 이런 지적을 받으면 자연스레 옷차림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변화는 남성 패션 시장에서 정장의 위축, 캐주얼의 부상으로 직결된다. 나인경 삼성패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남성 패션 시장에서 정장 매출이 차지한 비중이 최근 10년 사이 절반에서 3분의 1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패션연구소가 1997~2014년(5월까지) 남성 출근복 스타일을 조사한 결과 2008년을 기점으로 정장은 현격히 줄고, 캐주얼이 크게 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옷 잘 입어야 능력 인정받아”

하지만 일부에서는 직원의 옷 차림새가 기업 이미지와 직결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우석봉 대전대 산업광고심리학과 교수는 “패션이 기업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 기업에 대한 이미지가 패션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똑같이 자유로운 옷차림을 해도 만약 사람들 머릿속에 그와 상반되는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다면 그런 옷차림이 오히려 거부감만 일으킬 수 있다는 얘기다.

김나경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도 생각없이 유행을 좇는 ‘패션 경영’의 함정을 지적한다. 창의와 혁신이 트렌드긴 하지만 모든 기업에 걸맞는 생존 키워드는 아닌 만큼 자기 기업에 맞는 이미지를 먼저 찾고, 그 다음에 드레스 코드를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지현 세종대 교수는 옷차림 혁명을 생존 경쟁과 연결지어 설명한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건 단순히 옷을 단정하게 입으라는 게 아니라 옷을 잘 입으라는 것”이라며 “옷을 잘 입으려면 트렌드에 밝고, 항상 새로운 뉴스에 귀 기울여야 하고,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시대에 뒤쳐지지 말라’는 요구가 차림새에 반영되고 있다는 얘기다.

글=안혜리·윤경희·전민희 기자 hyere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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