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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식의 야구노트] 과학을 품은 야구 … 롯데가 가장 덕 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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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지난달 13일 잠실 경기에서 SK 나주환이 4회 2사 때 2루 도루를 시도하고 있다. 심판은 LG 유격수 오지환(왼쪽)의 태그가 더 빨랐다며 아웃 판정을 내렸으나 심판 합의판정 끝에 세이프로 정정했다. SK는 곧바로 역전에 성공, 합의판정으로 승부가 뒤바뀔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뉴시스]

지난달 26일 대전구장. 6회 말 한화, 8회 초 NC의 2루 도루 때 양팀은 각각 심판 합의판정을 요청했다. 느린 화면으로 분석한 결과, 두 번 모두 최초의 세이프 판정이 옳았다. 2루심은 얼마 전까지 오심 때문에 팬들의 원망을 많이 들었던 사람이었다. 예전 같으면 시비가 붙을 만한 장면이 탈 없이 넘어갔다.

 심판 판정에 과학(느린 화면)을 접목한 것, 게다가 시즌 중 실행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의 반대가 꽤 있었다. 2008년 도입됐다가 1년 만에 사라진 무제한 연장전처럼 충분한 논의 없이 새 규칙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야구위원회(KBO)는 합의판정 제도를 예상보다 일찍 도입했다. 7월 22일 시행해 9월 1일까지 프로야구에서 나온 합의판정 요청은 총 66회였고 이 가운데 29회(44%)가 번복됐다. 과학을 통해 인간의 실수를 44% 바로잡았다는 의미다.

 어떤 판정이라도 두 팀의 희비는 엇갈린다. 그게 오심이라면 손해 본 팀의 피해의식이 커지고, 불신과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명백한 증거를 보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합의판정 덕분에 프로야구의 싸움이 줄었다. 심판에게 심한 욕설을 한 NC 찰리와 물병을 집어던진 롯데 강민호는 합의판정 대상이 아닌 볼-스트라이크 판정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지난달 13일 SK는 합의판정으로 승부를 뒤집었다. LG에 1-3으로 뒤진 4회 초 2사에서 SK 나주환의 2루 도루가 아웃 판정을 받자 이만수 SK 감독이 합의판정을 요청했다. 이게 세이프로 정정됐고, 이어 임훈도 합의판정 끝에 몸 맞는 공으로 출루했다. 두 주자는 후속타 때 홈을 밟았고 SK는 8-5로 이겼다. 합의판정이 승패를 뒤집었다. SK는 기세등등했고 LG는 결과를 받아들였다.

 66차례 합의판정은 그만큼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롯데는 합의판정을 8번 요청해 6번의 정정(75%)을 이끌어냈고, 두산은 10번 중 2번 성공(20%)했다. 합의판정 요청은 선수와 감독, 구단 직원간의 호흡이 필요한 작업이다. 각 팀의 성공률을 비교하고, 득실을 따지는 것도 새로운 재미다. 합의판정은 미국 메이저리그의 ‘챌린지’ 제도에서 따왔다. 챌린지 요청엔 시간 제한이 없다. 코치·감독이 느린 화면을 본 뒤 비디오 판독 요청을 할 지 결정한다. 우리는 30초 내에 신청해야 하기 때문에 느린 화면을 거의 활용하지 못한다. 대신 선수의 사인과 감독·코치의 눈썰미에 의존한다.

 메이저리그의 챌린지는 정답을 알고 오답 수정을 요청하는 것 같지만 번복률 47%(1061번 중 498번, 1일 기준)로 우리와 큰 차이가 없다. 심판의 최초 판정이 옳았거나 카메라 15대로도 잡기 어려운 모호한 장면이 많다는 의미다. 이 통계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인간의 눈으로 정확히 판단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역설한다. 우린 과학을 통해 인간의 부족함을 깨달았고, 심판의 고충을 이해하게 됐다. 덕분에 야구는 신뢰를 회복하고 있다.

 우리 시스템은 미국보다 효율적이며 인간적이다. 메이저리그처럼 큰 비용(30개 구장 총 300억원)을 들이지 않고도 비슷한 효과를 얻고 있다. 심판에 도전(챌린지)하는 느낌 대신 합의판정이라는 겸양(謙讓)의 용어를 선택했다. 과학을 근거로 사람이 판단한다는 공감대를 만들었다. 심판의 권위는 떨어지지 않았고, 오심은 줄었다. 급하게 시작한 감은 있지만 합의판정 제도는 일단 1루에 안착했다.

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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