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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로봇 '또봇'의 진격 … 파워레인저 코가 납작해졌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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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한찬희 대표는 “27개월 된 딸이 장난감을 먹고 집어 던지고 올라타는 것을 보며 안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현재 또봇은 던지고 부러뜨려보는 강도 테스트는 물론이고, 영하 60~영상 60도에서 변형이 없는지 확인하는 한계 테스트도 받고 있다. [김경빈 기자]

취학 전 아이를 둔 집이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 있다. 자동차 모양을 한 장난감이 사람 형상으로 변신하거나 서로 합체하는 ‘변신로봇 또봇’이다. 2009년 출시된 또봇은 2011년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해 3년만에 600만개를 팔아치웠다. 주 타깃은 4~6세 남자아이지만 함께 보는 엄마들까지 ‘또덕(또봇덕후:매니아)’로 만들어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에는 물량이 부족해 ‘또봇대란’ ‘또봇품절’ 사태를 낳았다.

 2009년 연매출 209억원에 그쳤던 영실업은 또봇이 완판 행진을 이어간 2012년부터 매출이 급성장했다. 2012년 매출은 전년대비 55% 늘어난 542억원을 기록했다. 경쟁사인 일본 반다이사의 파워레인저 판매량을 넘어선 수치다. 지난해는 761억원을 달성해 레고코리아에 이어 국내 완구기업 매출 2위가 됐다.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레고코리아를 제쳤다. 침체된 완구 시장에서 유일하게 고공행진을 기록하는 셈이다.

 또봇을 만든 한찬희(41) 영실업 대표는 수차례 사업 실패가 또봇 성공의 기반이라고 말한다. 2002년 한 대표는 24시간 전일제로 운영되는 중국의 기숙식 유치원을 상대로 ‘로봇 선생님’이 나와 아이들을 교육하는 TV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저녁시간 교사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는 로봇 선생님을 소개하자 중국 유치원들이 구매의사를 알려왔다. 그러나 때마침 중국에서 사스가 발발해 양국간 교류가 어려워졌고 사업을 시작도 못해보고 접었다. 교육 방송을 만들기 위해 ‘홀맨’이라는 유명한 캐릭터의 사용권을 어렵게 땄는데 막상 쓰려고 보니 캐릭터에 입이 없어 돈만 날려버린 웃지못할 실패도 있었다.

 영실업에서 일하면서도 실패는 계속됐다. ‘제작위원회’로 대표되는 한국식 애니메이션 제작방식 때문이다. 보통 방송사·투자자·완구사를 비롯한 이해관계자들이 모여 제작위원회를 만들고 여기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이때 제작위원회 내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이 달라 스토리나 제품의 질,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애니매이션·도서·문구·완구·캐릭터생활용품 전반에 걸쳐 판매돼야 하기 때문에 독특한 캐릭터 대신 안전한 주인공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도 한계다. 간혹 주인공이 애니메이션에서나 가능한 화려한 변신 기술을 완구에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도 생겼다.

 한 대표는 “회사와 협력업체에 생사를 건 사람들이 수천명”이라며 “실패는 이 정도로 족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우리만의 캐릭터의 성공이 간절했다. 2000년대 초·중반 파워레인저의 인기를 앞세운 일본 회사들이 국내 업체들을 무시하거나 무리한 계약 조건을 내거는 경우가 많았다.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됐다.

 또봇은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기존 완구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다. 완구업체인 영실업이 자본 전액을 투자해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매번 실패한 ‘원소스 멀티유즈’ 대신 수익 모델을 구상해 완구를 만들고 이를 뒷받침할 애니매이션을 집중 제작했다. 아이들이 자주 접하는 국산 자동차를 모델로 해 자동차와 로봇을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게 했다.

 튼튼한 장난감이 만들어진 후에 애니메이션에도 공을 들였다. 특히 신경썼던 것은 폭력성을 없애는 것. 한 대표는 “남자 아이들이 열광했던 파워레인저나 트랜스포머 등의 변신 로봇들은 지구와 도시를 지키는 영웅이지만 또봇은 주변 사람을 도와주는 착한 친구”라고 말했다. 건강한 콘텐트로 인식돼야 부모님과 아이들이 함께 앉아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영실업이 만드는 여아용 완구 시크릿쥬쥬 캐릭터.

 폭력성을 없애는 대신 현실성을 높였다. 애니메이션 속 성우를 실제 주인공들과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이 연기하게 했고, 극의 배경과 에피소드도 또래 아이들이 직접 보고 먹고 겪는 일들로 구성했다. 극중 악당의 이름을 한류스타 원빈을 딴 ‘훤빈’으로 정하거나 주인공이 공격적으로 확장하는 프랜차이즈에 맞서 동네 떡볶이집을 지키는 스토리를 담아 친근감을 줬다.

 국산 자동차인 기아자동차의 실제 차종을 모티브로 한 것도 인기에 한 몫 했다. 아이들은 집에서는 애니메이션과 또봇 인형으로, 거리에서는 실제 자동차로 또봇을 계속해서 접했다. 한 대표는 “기아차 레이를 손가락을 가리키며 “또봇! 또봇!”이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또봇의 성공 덕분에 국내 완구제작 하청업체들도 활기를 되찾았다. 2009년 당시 국내 완구제작 업체 대부분은 후계자를 두기보다는 사업을 중단하거나 완전히 철수하려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초반에는 또봇의 주문 물량을 다 감당하지 못해 품절 사태가 자주 발생했다. 한 대표는 “IMF이후 국내 완구업체들은 문을 닫거나 추가 투자를 안해 노쇠했고 오히려 기술 개발을 꾸준히 해온 중국의 제조력이 더 나은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내 제조업 기반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판단에 한 대표는 물량이 달려도 국내 생산을 고집했다. 협력업체 중에서 계속 사업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고, 성장가능성이 있는 업체들을 선별했다. ‘플라스틱 사출-후가공-패키징-최종조립’ 각 단계를 담당하는 업체 네 군데를 선정해 ERP(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으로 관리했다. IT기반이 약한 영세 제조업체들에게 휴대폰으로 실시간 주문과 발주, 재고 관리 시스템을 제공한 것이다.

 제조 책임을 맡은 영실업이 생산관리를 맡자 전체 생산과정이 한 회사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안정화 됐다. 계획에 따라 제조 물량이 맞춰지고 재고 부담도 없어졌다. 100여군데 협력업체에서 3000여명이 또봇 덕분에 일자리를 찾았다.

현재는 밀려드는 주문량을 감당 못해 중국과 인도네시아에 글로벌 생산기지를 구축해 해외 생산을 병행하고 있다. 해외 완구 유통사나 하청업체 수준에 머물렀던 국내 완구산업이 해외공장을 둘 정도로 성숙한 것이다.

 한 대표는 또 생산 업체들이 한 곳에서 일괄 공정을 구축할 수 있도록 공장을 물색하고 있다. 디자인센터와 제조공정이 연결돼야 고품질의 제품이 나올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 대표는 “레고가 ‘레고용 플라스틱’을 자체 생산해 쓰는 것처럼 우리도 강도와 안정성이 높은 ‘또봇에 적합한 플라스틱’을 개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완구 제작 뿐만 아니라 플라스틱·철강·패션·캐릭터 등 연관 산업들 전반이 동시에 성장하도록 끌어가겠다는 포부다.

 그의 목표는 영실업을 미국 마텔사, 일본의 반다이사와 같이 장수하는 글로벌 완구 기업으로 키우는 것이다. 영실업은 올해부터 필리핀·싱가포르·말레이시아·대만 4개국에 또봇을 수출한다. 장난감 단독으로 팔아왔던 기존 방식과 달리 애니메이션과 완구를 동시 수출한다. 한 대표는 “또봇은 30년 장수 브랜드가 될 것”이라며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자리잡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글=채윤경 기자
사진·영상=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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