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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유가족의 지혜, 세월호 정국 풀 수도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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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추석이 다가온다. 그 전에 꽉 막힌 정국이 풀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의 길이 활짝 열렸으면 좋겠다. 유가족의 희생과 고통이 유실되지 않고 안전한 대한민국을 세우는 귀중한 에너지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박근혜 대통령의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고, 집권여당의 책임의식, 야당의 충실한 민의 대변이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는 정국 해법의 열쇠를 유가족이 가진 모양새가 되었다. 이에 유가족의 지혜를 검토하고자 한다.

 우선 유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이 복잡하게 꼬이고 있다. 곁가지를 쳐내고 핵심을 견지하면서 유연성을 발휘해야 할 때다. 유가족 옆에 다수의 국민이 있다. 같이 울었고 같이 고통을 체감했던 수많은 국민이 있다. 유가족은 이들과 같이 가야 한다. 둘을 분리시키려는 공작과 음해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 때문에 지혜가 요구된다.

 먼저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지 말자. 조사위의 수사권과 기소권이 문제의 핵심인 것처럼 거론되지만, 사실은 진상 규명에 있다. 진상 규명의 목적을 위해 수사권과 기소권의 수단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 현실에서 정확하다. 이를 지지하는 국민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 집착하다 보면 법리 다툼이 나오고 결국 힘싸움으로 전락한다. 그 때문에 진상 규명의 가치(목적)만을 옹호하고 이를 위한 최적의 수단(법과 제도)은 정치권의 책임으로 돌리면 어떨까 한다.

유가족이 마치 정치권의 합의를 계속 비토하는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롭지 않다. 다만 정치권이 제시하는 수단으로 진상 규명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는 유가족이 홀로 결정하지 말고 국민의 판단을 묻는 절차를 밟았으면 좋겠다. 공정한 표본조사로 국민 의사를 비교적 빨리 검증할 수 있는 고급 능력을 우리는 이미 확보하고 있다. 이렇게 유연해지면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국민의 소리가 더 분명하게 모일 수도 있다.

 둘째, 세월호 진상 규명의 두 경로를 분화시키면 좋겠다. 하나는 관련자의 수사와 기소로 가는 사법 과정이다. 이 과정의 주역은 법조인이다. 다른 하나는 사법 과정을 청취하고 감시하는 공론활동이다. 신문, 방송, 언론인이 통상 주역이다. 그러나 근래엔 단순한 대의민주주의나 거리투쟁의 민주주의를 넘어 쟁점에 따라 문제를 세밀하게 추적하는 ‘시민검증 민주주의(monitory democracy)’가 꽃을 피우고 있다. 유가족이 여기에 착안하기를 권유하고 싶다. 출발점은 과욕처럼 보일 수 있는 욕망을 자제하는 것이다.

즉 사법 절차는 전문가에게 맡기되 이를 감시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가칭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유가족 국민 검증위원회’ 같은 공적 기구의 한시적 법제화를 요구할 수 있다. 이 기구의 공적 위상과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유가족이 추천하는 인사를 국회나 대통령이 위원회의 장으로 임명하는 절차를 밟게 할 수 있다. 그러면 견제와 균형, 전문가와 시민의 역동적 관계가 큰 관심을 끌 것이다.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매우 어렵지만 귀중한 지혜는 유가족의 역할을 제도권에 대한 불만, 항의, 감시의 ‘소극적’ 기능으로부터 안전한 대한민국의 건설을 위한 봉사의 ‘적극적’ 기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유가족은 현재 진상 규명과 함께 안전한 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정부에 안전사회를 요구하지만 오랫동안 누적된 정부운영의 체질과 관행 탓에 턱없이 부족하다. 삶의 위험들이 도처에 너무 깊고 넓게 퍼져 있다. 새로운 출발은 생활현장에서 위험을 청취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풀뿌리 운동이 전국을 잇는 인터넷 소통망으로 연결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들이 정부, 지방자치단체, 유관 조직(기업 등)에 압력을 넣고 이들의 신속한 호응을 이끌 때 변화의 시너지 효과는 가시화된다. 세월호 유가족은 이 운동을 이끌 수 있는 도덕적 힘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앞장선다면 많은 시민이 동참할 것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지원도 클 것으로 예상한다. 일찍 가족 곁을 떠난 자녀들의 꿈을 이 세상에 꽃피우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척박한 정치현실에서 이 제안들은 공허한 이상처럼 들릴 수도 있다. 과도한 기대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야를 좀 더 넓게 보자. 우리나라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안전사회 건설은 조그만 정책 분야가 아니다. 국가운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우는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것을 국가개조로 명명했다. 세월호 참사는 그 필요성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이것을 이끄는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다. 불행히도 우리는 지난 10여 년간 이 에너지의 제도화에 번번이 실패했다. 웅장한 외침들이 성과 없는 낭비로 유실되었다. 이번에도 그럴 위험이 농후하다.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열쇠도 결국 유가족이 쥐고 있다. 추석을 맞이하여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미래의 희망으로 성묘를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