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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복합의 디지털 시대 최치원에게 길을 묻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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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09면

김양동의 ‘계원필경 중원제사(中元齊詞)’(2014), 화선지에 먹, 180 × 250cm
23일 열린 ‘인문학자와 예술가의 대화’ 참석자들이 작품 설명을 듣고 있다.

“풍류? 그거 술 먹고 춤 추고 노는 거 아냐?”

‘최치원-풍류탄생’전 … 10월 12일까지 예술의전당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에서 열리고 있는 ‘최치원-풍류(風流)탄생’전은 우리가 흔히 하는 ‘풍류’라는 말에 대한 이 같은 해석에 정색을 하고 딴지를 건다. “풍류야말로 우리 인문·정신 문화의 원형질로, 식민지와 서구화로 점철된 근현대 100여 년의 역사에서 단절되고 왜곡된 우리의 본 정신”(이동국 서예박물관 서예부장)이라는 것이다.

‘풍류’라는 말은 『삼국사기』진흥왕조 ‘난랑비’ 서문에 나온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

토착사상인 무(巫)를 토대로 유(儒)·불(佛)·선(仙) 삼교의 소통을 ‘풍류’라는 틀로 녹여낸 인물이 최치원(857~909?)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융·복합적 인물’이다.

전시는 이 ‘융·복합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기획됐다. 서예·타이포그래피·서화·회화·사진·설치·미디어 그리고 춤까지, 현재 대한민국 예술의 최전선에 있는 작가 38명(작고작가 2명 포함)이 고운 최치원과 ‘풍류’에 연관된 작품 100여 점을 선보였다. 이들 중 일부는 지난 5월 30일과 31일 이틀간 경주·지리산·가야산 등 1100년 전 선인의 족적을 따라나서며 영감을 얻기도 했다. 여기에 사산비명 탁본, 최치원 진영(眞影) 및 영당 현판,『계원필경』영인본 등 고운 선생의 흔적 50여 점까지 한자리에 그러모았다. 7월 30일 시작된 전시는 은근한 관심과 성원에 힘입어 기간이 당초 9월 14일에서 10월 12일로 늘어났다.

23일 오후 2시 서예박물관 3층에서는 작가들과 관객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21세기 풍류를 말하다-인문학자와 예술가의 대화’가 열렸다. 풍류의 의미를 반추하면서 이를 문화융성의 기점으로 삼으려는 이날 자리의 뜨거운 토론은 예정된 두 시간이 지나도 식을 줄 몰랐다.



‘최치원-풍류탄생’(7월 30일~10월 12일)
-참여 작가는 총 38명. 작고 작가가 2명(백남준, 박생광)이다. 성인 5000원, 매주 월요일 휴관.

서예/타이포그래피: 권창륜 박원규 이돈흥 김영기 전정우 정도준 / 정병규 최창섭 서화: 박대성 김양동 김종원 노상동 문봉선 홍지윤 박병춘 회화/사진: 김종학 황재형 유승호 이강일 이길우 / 배병우 이갑철 조용철 설치/미디어: 서용선 최정화 장인선 전성근 정종미 채우승 / 오윤석 한상아 필가묵무 : 홍승엽 + 김무호 백승민 최형주 허회태

-9·10월 각각 전시장 내에서는 부대 행사가 마련된다. 9월 20일 오후 5시 ‘풍류마당1-가무’에서는 김양동·황재형·최정화 작가와의 대화에 이어 김연(판소리)·박원규(북)·이애주(춤)가, 10월 4일 오후 5시 ‘풍류마당2-동서’에서는 서용선·정종미·김종원 작가와의 만남과 함께 최인(클래식 기타)·원장연(대금·신디사이저)이 풍류 정신을 기리는 판을 벌인다.


문창후 최선생 진영. 조선시대(1830년). 98 x 70.6 cm. 삼베에 색. 쌍계사 소장.
김종원의 ‘고운선화산영(孤雲仙化山靈)’(2014), 한지에 주사, 먹. 210 x 150 cm.

유·불·선 아우르는 풍류의 세계
이날 행사가 열린 서예박물관 3층 맨 끝방은 선방(禪房) 같았다. 전시 기간 중 토요일 오후마다 현대무용가 홍승엽씨가 춤으로 관람객을 만나는 이 공간에 고동색 방석들이 얌전하게 놓여있었다. 서화를 하는 김양동·김종원, 서예가 박원규, 설치 미술가 최정화·장인선, 화가 유승호, 장일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방석 위에 정좌했다.

이동국 서예부장이 “도대체 풍류가 뭔지, 이 시대에 왜 풍류가 중요한지”를 물었다.

“한반도의 풍류라는 게 화랑도를 통해 놀이, 유희 개념과 접목됐습니다. ‘풍류남아’ ‘대풍류’가 그런 것들이죠. 중국 『예기』에 보면 ‘풍화유행’이라 해서 ‘풍속이 아름다운 쪽으로 변해서 흘러간다’는 말이 있고, 일본에서는 섹시한 여성을 일컫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그런데 최치원 선생은 풍류를 말할 때 ‘유불선을 아우르며 접화군생(接化群生)한다’고 했어요. 즉 인간이 생명체로 태어나 생명을 준 이 땅에 어떻게 동화되어 살 것인가, 이것을 터득하는 게 풍류라고 봅니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김종원)

“이렇게 생각하면 좀 쉬울 것 같아요. 풍이 뭐고 류가 뭔가. 바람과 물입니다. 그럼 바람이 뭐냐. 태양 에너지에 의한 공기의 이동이지요. 즉 태양 숭배를 상징화한 것입니다. 빛과 같이 거침없는 광명의 세계를 뜻하지요. 류는 무애의 경지를 말합니다. 물과 같이 자재로운 흐름의 세계를 의미하죠. 다시 말해 ‘풍’은 천도(天道)이고 ‘류’는 지도(地道)인데, 천도와 지도를 합친 것이 인도(人道)입니다. 자연의 총체적인 융합사상, 그것에 상생하고 순응하면서 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이끌어가는 그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뜻이죠.”(김양동)

그런 풍류를 연구하며 예술가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젊은 화가 유승호씨는 ‘풍류’에서 영감을 얻자는 컨셉트를 들었을 때 “안절부절 못할 정도로 기쁘고 행복했다”고 털어놓았다. ‘도대체 한국적이란 게 뭔가’ 하는 화두를 오래 고민해 왔지만 잡히는 게 없었는데 자료를 찾으며 뭔가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라고 했다. “최치원 선생님이 (책 잘 안보는) 화가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셨어요.”

설치미술가 장인선씨는 ‘조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들려주었다. “답사하면서 우리 강산 곳곳에 남아있는 유불선의 조화로움을 새삼 느꼈어요. 다른 나라는 종교 때문에 전쟁을 하는데, 서울만 해도 교회와 성당과 절과 무당집이 공존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이런 조화로움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죠. 좀 더 크게 본다면 통일 문제도 풍류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장일규 교수는 “도당 유학생으로 귀국해 세계 문화와 신라 문화를 아우르려고 노력한 최치원은 현학적으로 살던 분이 아니다”라며 “시무십여조 등을 통해 사회개혁안을 제시한 그의 열정을 오늘날 같은 국가적 재난에 아무런 수습도 못하고 있는 우리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 관람객이 질문했다. “그렇다면 풍류적인 해결이란 어떤 것인가요.”

서화가 김종원씨는 “뒤섞인 것에서 본질을,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답했다. “아까 말씀드렸듯 풍류란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에 대한 탐구가 있나요? 요즘 우리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통찰 없이 표피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지엽말단에 집착하는 것은 풍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고 이동국 부장이 자리를 정리했다. “정보화 사회, 문자 영상 시대의 키워드는 융복합입니다. 그런데 융복합은 이미 우리 역사 속에 이루어져 있었죠. 그 융합DNA를 서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역사의 심연에서 끄집어 내 다양한 장르의 예술언어로 시각화해보자는 것이 이번 전시의 취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문과 예술이 만나는 고리가 바로 서(書)인 것입니다.”



최치원(857~909?)
신라 경주에서 육두품으로 태어나 12세(868년)에 당나라 국자감에 유학, 18세(874)에 외국인 최고 성적으로 빈공과에 급제했다. 25세(881)에 ‘토황소격문’으로 중국에서 문명(文名)을 떨쳤다. 28세(884)에 귀국해 38세(894)에 ‘시무십여조’라는 사회개혁안을 제시했으나 뜻을 펼치지 못하고 42세(898)에 주유천하를 시작했다. 52세(909) 이후로는 신발만 남긴 채 가야산의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의 명문장가 이규보는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처음 해낸 파천황의 큰 공을 세워 동방의 학자가 모두 종조로 삼는다”고 그를 기렸다. 조선 성종 때 ‘사리가 순수하고 바르며 치교에 도움이 되는’ 동방 문인의 글을 모아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할 때 『계원필경』에 실린 370편의 시문 가운데 152편이 그대로 수록됐다.


오윤석의 ‘Hidden Memories-1403’(2014), 200 x 120 cm(10장), hand-cutting on paper, acrylic

신발만 남기고 사라진 고운 … 신선이 되었을까
토론회가 끝나고 전시장 투어가 시작됐다. 전시장은 크게 네 가지 주제로 구성됐다. ‘토황소격문’으로 필명을 얻은 중국 양주 및 신라 경주라는 출세의 공간을 지리산 및 가야산이라는 선계와 대비해 놓고 그의 실존과 정신을 예술로 풀어낸 ‘최치원의 길을 따라-1000년의 대화’, 무(巫)와 유불선 삼도의 회통으로 풀어낸 ‘풍류의 역사와 정의’, 시문과 글씨에 초점을 맞춘 ‘가을밤 비는 내리고’, 그 옛날 가객(歌客)과 묵객(墨客)이 한마당에서 어울렸듯 필가묵무의 공연을 펼치는 ‘솔바람 하늘을 닦고’다.

2층과 3층을 틔워 놓은 전시장 바람벽에는 각종 암벽석각과 영당 현판을 탁본한 글씨들이 시원시원하게 붙어있다. 그 앞에 장승처럼 서 있는 작품은 서용선 작가의 ‘출세’와 ‘입산’. 최치원의 치열한 사회참여와 개혁에의 좌절, 자연으로의 칩거를 돌무더기 위 목판 드로잉으로 구현했다. 황재형 작가는 “최치원이 세월호 현장을 찾았다면 피가 거꾸로 솟았을 것”이라며 뒤집혀진 초상화 위에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냈다. 작품 이름이 ‘새벽에 홀로 깨어’다.

3층 입구에 널찍하게 펼쳐져 있는 작품은 정종미 작가의 ‘풍류-흐르다’. 공중에는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탁본 등을, 바닥에는 종이로 만든 연꽃을 띄워 놓았다. 서체전문가 정병규는 테이프를 찢어 붙여가며 ‘추야우중’의 절절함을 글씨로 표현했다. ‘쌍녀분’ 설화를 들은 한상아 작가는 ‘테이크 디스 왈츠(Take this waltz)’라는 수묵 애니메이션으로 젊은 날 그의 사랑을 그려냈다.

설치미술가 최정화씨의 ‘신빨 용됐네’ 앞에서는 다들 왜 슬리퍼가 용 모양으로 이어져 ‘작품’이 됐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이동국 부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최치원에게 신발은 중요한 상징물입니다. 그는 가야산 자락에서 신발만 남기고 종적이 묘연해졌죠.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됐다고 믿었습니다. 이 작품은 거기서 모티브를 따온 것입니다. 가야산을 지키는 용이 됐음을 암시하고 있죠. 옆에 ‘운룡도’를 함께 배치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최정화 작가가 설명을 보탰다. “일상과 담을 쌓은 것, 뭔가 비일상적인 것이 예술이라고 하죠. 저는 예술보다 일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본질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계속 해오고 있죠. 흔해 빠진 알록달록 슬리퍼로 작품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관람객 사이에서 탄식이 들렸다. “아, 이게 그런 것이었군요. 그걸 몰랐네.”

‘풍류’라는 두 글자를 아주 크게, ‘난랑비서’의 글을 다양한 색깔의 먹글씨로 구현한 서예가 박원규씨는 제작 뒷얘기를 들려주었다. “이 종이가 원래 가로 6m, 세로 2m짜리입니다. 한 장에 50만 원이에요. 15년 전에 2500만 원 주고 중국에서 50장 사둔 것입니다. 요즘은 이런 종이가 나오질 않아요. 만들기가 아주 힘들거든요. 그런데 작은 글씨는 왜 회색도 있고 붉은 색도 있느냐. 먹이 달라서 그래요. 청(靑)먹을 갈면 회색이, 주(朱)먹을 갈면 빨간색이 나오죠. 주먹은 몇 백만원 하는 것도 있어요.”

작품 하나에 이야기 하나, 최치원은 그렇게 우리 곁에 현신(現身)했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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