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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커피집 무대서 영국 록 태동 … 지금은 명판만 남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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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14면

1960년대 런던 문화의 중심지였던 카나비 스트리트. 지금까지도 런던의 패션 중심지로 건재하다. [사진 조현진]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는 로큰롤의 암흑기였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군 입대, 제리 리 루이스의 혼인 스캔들, 리틀 리처드의 종교인 변신 등으로 초기 로큰롤 선구자들은 무대에서 그리고 관객에게서 자의반 타의반 멀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1959년 2월 3일 버디 홀리마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로큰롤은 죽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영국 록의 원류를 찾아서 ① 런던 소호

하지만 미국 출신의 로큰롤 1세대들이 남긴 공간을 영국 출신의 록밴드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빅4인 비틀스, 롤링 스톤스, 후, 킹크스를 앞세운 영국 밴드들이 미국 음악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다.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으로 불리는 이 현상은 로큰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으로 꼽힌다.

관광객 위한 로큰롤 체험 관광프로그램
지난해 중앙SUNDAY ‘팝의 원류를 찾아서’ 제하의 연재를 통해 소개했듯, 미국의 많은 로큰롤 유적지에는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조성돼 있고 관광객이 이를 편하게 관람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영국은 미국만큼 풍부한 로큰롤 역사가 있지만, 비틀스를 배출한 리버풀을 제외하면 미국처럼 로큰롤 관광명소 개발이 활발하지 못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굳이 로큰롤이 아니더라도 오래된 왕실문화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아닐까.

비록 박물관이나 기념관 같은 상설 기관은 아니지만 다양한 로큰롤 체험 관광 프로그램이 방문객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로큰롤의 중요한 장면이 연출된 많은 곳이 이제는 업종이 변경됐거나 도시 개발과 함께 흔적마저 사라진 곳도 많지만, 시는 명판(plaque)을 제작해 제막하는 등 대중음악 역사 보존을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다. 진한 감동과 매력적인 사연이 담긴 명소를 일일이 찾아가 대중음악의 역사를 되새기는 일이야말로 영국 로큰롤이 주는 또 다른 매력이다. 런던에서 로큰롤 향수를 느끼기에 최적의 출발지는 시내 중심부 소호(Soho) 지역이다.

레드 제플린 매니저, 무명 시절 문지기
소호 로큰롤의 중심에는 56년 문을 연 2i's 커피 바가 있다. 지금은 다른 카페로 탈바꿈했지만 시는 개업 50주년을 기념해 2006년 이 건물에 명판(사진)을 제막했다. 명판 중앙에 ‘영국 로큰롤 탄생지’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보인다. 클리프 리처드와 바이퍼스 등 영국 초기 로큰롤 음악인들의 이곳에서의 무대가 이후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등의 성공에 기여했다는 작은 감사 표시다. 훗날 하드록의 원조 레드 제플린의 매니저로 활동하게 되는 피터 그랜트는 무명 시절 여기서 문지기로 일했다.

레드 제플린이 처음 결성돼 리허설을 한 장소도 소호다. 지금은 차이나타운 내의 중국 식당이 됐다. 영국 로큰롤 초기의 전설적인 밴드 야드버즈가 해체되면서 밴드를 끝까지 지킨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가 새 멤버를 모은 직후였다.

보컬로는 로버트 플랜트가 영입됐는데 지미는 원래 테리 라이드라는 보컬을 원했으나 그가 사양했다. 테리는 훗날 하드록에서 큰 획을 긋게 되는 또 다른 밴드인 딥 퍼플 결성 때도 보컬로 영입 제의를 받았지만 이 역시 거절해 ‘가장 운 없는 보컬리스트’로 회자되곤 한다.

음악인 모이던 ‘카나비’는 패션 거리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긴축정책이 완화되고 경제가 활력을 찾게 되는 1960년대 런던에는 낙관주의와 쾌락주의 성향의 역동적인 문화가 확산된다. 언론은 이를 ‘스윙잉(Swinging) 런던’이라고 명명했고 그 중심에 카나비 스트리트가 있다. 지금도 런던의 패션 중심지 역할을 하는데, 60년대 이후 많은 아티스트가 모여들었다. 록밴드 U2의 인기곡 ‘Even Better Than the Real Thing’ 뮤직 비디오가 이 거리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인기 록밴드 스몰 페이시스의 사무실이 있던 자리에는 시가 2007년 제막한 동판을 찾을 수 있다. 당시의 활발했던 모습은 지난해 뮤지컬로도 제작돼 공연에 들어갔다.

소호 서편에 패션 1번지 카나비 스트리트가 있다면 동편에는 악기 1번지인 덴마크 스트리트가 있다. 더 킹크스가 일찍이 그들의 곡에서 “어디인지 모르면 귀와 코를 따라가라 / 발 박자 맞추는 소리에 온 거리가 진동한다”고 재치 있게 표현한 바로 그 거리다. 지금은 기타 전문점이 된 리젠트 사운드는 과거 녹음 스튜디오였는데, 롤링 스톤스가 데뷔 음반을 녹음한 장소로 늘 관광객들로 꽉 차 있다. 이곳에서 연습하다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럽다”는 주변 항의에 쫓겨난 음악인도 있었으니 바로 지미 헨드릭스다.

오아시스의 출세작 ‘모닝 글로리’의 음반 표지(작은 사진)와 촬영지인 버윅 스트리트.

유명 음반 표지가 촬영된 장소를 찾아가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오아시스의 1995년 음반이자 이들의 글로벌 출세작인 ‘모닝 글로리’ 음반 표지는 버윅 스트리트에서 촬영됐다. 밴드 리더 노엘 갤러거가 원래 등장하려 했으나 당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음반 디자이너가 대신 등장(앨범 표지에서 등지고 있는 사람)했다. 버윅은 오랫동안 런던 내에서 제법 괜찮은 음반 상점들이 밀집해 있었고 아직도 영업 중인 곳들이 있어 음악팬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많다. 가수 엘튼 존은 록스타가 된 이후인 70년대 초까지 이곳에 있던 뮤직랜드 음반점에서 일해 손님들을 놀라게 했다.

1972년에 발표된 데이비드 보위의 음반 표지(작은 사진)와 촬영지인 헤돈 스트리트.

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로큰롤의 기념비적인 음반 표지가 촬영된 장소가 또 한곳 나온다. 데이비드 보위의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음반의 표지가 촬영된 헤돈 스트리트다. 영국 국립우체국이 2010년 로큰롤 중요 음반 표지 10점을 선정해 우표를 발행했을때도 포함된 표지다. 당시 어둡고 쓰레기 가득찬 거리는 이제 세련된 식당들로 채워졌다. 표지에서 보위 머리 위에 있던 ‘K. West’ 간판은 오래전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이곳이 음반 표지 촬영 장소임을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있다. 보위가 이 음반 작업 때 입었던 의상을 포함한 300여 점의 소품들은 지난해 3월 런던이 자랑하는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 세계 순회전을 시작, 24일 독일 베를린 전시를 마무리했다.

소호 중심에는 ‘소호 스퀘어’로 명명된 작은 공원이 있다. 싱어송라이터 커스티 맥콜은 이 공원을 자신의 노래로 남겼고 그녀가 사망한 뒤 공원에는 그녀를 추모하는 벤치도 생겼다.

수 많은 라이브 바·식당에 록의 역사
이 주변 수많은 라이브 바나 식당도 로큰롤의 역사다. UFO나 마키(Marquee)처럼 이미 사라진 전설적인 곳들도 있지만, 펄프의 노래에 영감을 준 바 이탈리아(Bar Italia)와 재즈 클럽으로 시작한 로니 스캇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소호의 명소다. 백 오 네일스(Bag O'Nails)는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와 그의 첫 아내인 린다가 처음 만난 장소로 로큰롤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데, 역시 이를 기념하기 위한 명판이 붙어있다. 옥스퍼드 도로 100번지에 위치한 ‘100 클럽’은 76년 9월 21일 섹스 피스톨스와 클래시 등이 참가한 세계 첫 펑크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롤링 스톤스는 86년 2월 23일 이들의 피아니스트였던 이안 스튜어트 사망 직후 추모 공연을 갖기도 했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해리 닐슨이 소유했던 커즌 스트리트의 한 아파트는 영국 로큰롤에서 매우 슬픈 장소로 기억된다. 해리는 자신이 런던에 없을 경우 이 아파트를 지인들에게 곧잘 빌려줬는데 74년 7월 29일 마마스 앤드 파파스의 마마 카스가 런던 공연 후 이곳에 머물다 숨졌다. 그녀 나이 32살이었다. 햄 샌드위치를 먹다 숨이 막혀 사망했다는 첫 보도는 나중에 오보로 밝혀졌지만 4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오보는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4년 뒤인 78년 9월 7일, 광기의 드럼 연주 스타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후(The Who)의 키스 문은 폴 매카트니가 초대한 파티에 갔다 돌아온 뒤 마마 카스가 숨진 같은 침대에서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진다. 당시 32살. 이 사건 이후 해리는 아파트를 처분했다.

그런데 2012년 런던 하계 올림픽 준비위원회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폐막식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는 피날레 주인공으로 후를 선정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망한 지 34년이 지난 키스 문에게 초청장을 보낸 것. 더 후는 65년 발표한 그들의 대표곡 ‘마이 제너레이션(My Generation)’에서 “난 늙기 전에 죽고 싶어(I Hope I Die Before I Get Old)”라는 파격적이고 상징적인 가사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더 후의 매니저는 올림픽 준비위에 “키스는 이 가사에 충실했고 지금은 한 화장터에서 쉬고 있다”고 답해줬다.



조현진 YTN 기자·아리랑TV 보도팀장을 거쳐 청와대에서 제2부속실장을 역임하며 해외홍보 업무를 담당했다. 1999~2002년 미국의 음악전문지 빌보드 한국특파원으로서 K팝을 처음 해외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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