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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령·미령 자매는 만날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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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현대 중국의 국부로 추앙 받는 손문의 미망인 송경령 여사(90)의 임종을 앞두고, 장개석 총통의 미망인이며 지난 32년간 서로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동생 송미령 여사(80)가 북경으로 가서 언니를 만나볼 것인가의 여부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다.
중공당국은 만성백혈병에 시달려온 경령 여사의 임종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장례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그녀에게 공산당의 입당을 승인하고 명예국가주석에 추대했다. 중공은 또 지난 5년 동안 뉴욕에서 피부암 치료를 받고있는 미령 여사에게 언니의 위독을 전문으로 알리면서 임종에 참석하도록 북경방문을 초청했다.
미령 여사는 아직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자유중국 측은 그녀의 중공방문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면 서도 그녀가 언니의 임종에 참석한다면 총통의 행적은 물론 국부의 국기마저 뒤흔들 것이라고 일말의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북경에서는 총통 미망인이 장 총통의 유골을 남경에 봉안하는 조건을 내걸고 북경당국과 자신의 중공방문을 타협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자매는 혁명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다같이 위대한 혁명가를 남편으로 맞았으며 그들 자신도 혁명에 헌신했지만 서로 엇갈린 길을 걸었다. 이들 자매가문의 역사에 중국현대사가 그대로 묻혀있다고 할만큼 송씨 가문의 영광과 비극은 특이하다.
광동성 해남도의 객가 (중국의 유대인으로 불리는 타관박이로 손문이나 중공당부주석 등소평도 객가 출신임)집안에서 태어난 송요여(1861년생 추정)는 손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보스턴에서 약방을 경영하던 외삼촌의 초청을 받고 14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한 미국인선주의 도움을 받고 대학 (반더빌터대·신학전공)까지 다닐 수 있었다.
1880년대에 목사로 상해에 부임한 그는 곧 목사를 팽개치고 종교서적출판에 뛰어들었다. 상해를 지배하던 서양인들이 목사에게조차 중국인이라 하여 차별대우를 하는데 격분했기 때문이었다.
송요여는 이때 상해의 명문가 규수며 그 자신과 같은 독실한 감리교 신자를 아내로 맞아 훗날「송왕조」라는 비양거림과 선망을 일문에 모았던 3남 3녀를 낳았다.
맏딸 애령(남편은 공양희로 중국 4대 재벌 중 금융재벌·혁명가·정치가임. 절강출신·미 오벌린대졸업), 둘째딸 경령, 맏아들 자문(중국근대 재정체제를 확립·행정원장 등 국민당 정부요직을 두루 거침·하버드대출신), 둘째아들 자안, 새째딸 미령, 막내아들 자량이다.
1900년대 초에 출판사업으로 백만장자가 된 송요여는 상해의 명망가로 당시 청조타도를 위해 혁명거사에 여러 번 실패했던 손문을 만난다.
손문이 혁명군자금을 공급받고 혁명선언문 등「불온문서」를 제작하여 혁명운동을 뒷바라지하던 송가에 드나둘 때 미령 (l901년생)은 갓난 아기였고 경령은 코흘리개였다고 한다. 송씨일문 영광과 비극은 손문과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송요여는 젊은 날의 어려웠던 수학을 생각하여 자녀들을 차례로 미국에 유학 보내는 한편 자녀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세 딸이. 모두 미국의 여자 명문 웨슬리대를 졸업했고 장남 자문은 하버드대를 나와 훗날 장개석 정부에서 재무장관과 행정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중국재정을 혁신한 유능한 행정가였다.
맏딸 애령은 1911년 신해혁명이후 손문의 개인 영문비서로 일했다. 13년 원세개 정권에 반대하는 혁명에 실패한 후 손문과 송씨 일가가 동경으로 망명했을 매 맏딸은 손문의 막료 공양희와 혼인하고 영문개인비서 자리를 동생 경령에게 넘겼다.
1915년 (14년 설도 있음)에 손문과 경령은 혼인했다. 민족사상과 혁명의 성공에 확신을 품었던 경령은 25년 손문이 북경에서 중국통일혁명을 이루지 못한 채 병사하자 망부의 유지를 관철하기로 맹세했다. 동생 미령이 27년에 장개석과 혼인하려하자 경령이 한사코 말리다가 결국 송씨일문과의 의절을 선언했다. 송씨자매의 비극은 경령의 혁명관에서 비롯한다.
손문이 유망한 청년장교 장개석을 처제 미령에게 소개했을 때 장은 그 미모와 지성을 한눈에 사랑하게 됐다. 장은 첫째부인 진여사와 이혼하고 또 감리교 신자로 세례를 받고야 미령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령은 한사코 총통을 반대했다. 손문이 남긴 국민당의 대권을 놓고 왕정위 등 좌파와 다투던 총통은 손문의 작품인 국·공 합작을 파기했다. 경령은 국·공이 합작하여 군벌을 토벌하여 중국을 통일한다는 손문의 뜻을 거슬린 장을 야심가로 여겼고 그녀의 이 같은 생각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자매이면서도 성장한 이후 중국의 부강과 통일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졌음에도 실전 면에서는 서로의 입장을 달리해 평생 평행선을 그었던 두 자매의 운명은 자매여서 그랬을까 할 정도로 많은 비슷한 점을 가지고있다.
세 자매가 모두 빼어난 미모에 기품과 지성을 가졌던 것은 그렇다 치고도 경령과 미령은 모두 재혼의 상대자가 되었다. 그들은 또 슬하에 그들 자신의 자녀를 두지 않았다. 그들은 전실자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도 우연치고는 똑같았다. 손문의 아들 손료는 경령과는 달리 장 총통의 측근으로 입법원장과 행정원장을 지내 어머니와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미령여사도 총통사망 후 뉴욕에 거주하는 중요한 이유가 전실소생 장경국 총통과의 불화 때문이라는 설이 파다하다.
장 총통은 30년 이후 자신에 사사건건 맞서는 처형 경령여사를 자택에 연금 시켰지만 49년 중공의 대륙석권 때 모택동의 편을 택해 그후 중공국가부주석으로 활약했다. 두 자매의 운명이 완전 적대관계에 빠진 49년 이후 송씨일문의 다론 가족 애령과 공양희 부부. 자문 등은 중립을 택해 미국으로 이주, 모두 죽고 두 자매만 32년간 서로 적지에서 귀순해오길 간절히 바랐다.
경령의 임종을 앞두고 그들은 과연 마지막 만남을 통해 송씨일문을「통일」하고 두 중국의 통일을 상징하는 징검다리가 될 것인가?

<이수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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