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백성호의 현문우답

네 잎 클로버 찾는 법

중앙일보

입력 2014.08.30 00:22

업데이트 2014.08.30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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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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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한 사람이 풀밭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보기 드문 ‘네 잎 클로버’가 곳곳에 보였습니다. “여기 네 잎 클로버가 널렸어!” 친구들이 다가왔습니다. 다들 네 잎 클로버를 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 멀뚱멀뚱 서 있습니다. “넌 왜 안 따?”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세 잎 클로버가 좋아.”

 얼마 전 그 사람과 식사를 했습니다. 왜 ‘세 잎 클로버’를 더 좋아하는지 물어봤습니다.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을 상징한다. 그건 지금 내게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운이고 요행이다. 나는 그런 것에 기대서 살고 싶진 않다. 그래서 ‘세 잎 클로버’가 더 좋다.” 점점 더 궁금해지더군요. 왜 세 잎이 더 좋을까. “‘세 잎 클로버’는 행운이 아니다. 어디에나 널려 있고, 아주 평범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거다. 나는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 행운을 찾는 것보다 행복을 찾는 게 내게는 훨씬 더 중요하다.” 실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입니다.

 듣고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우리는 종종 ‘내 인생의 네 잎 클로버’에 승부수를 던집니다. 이 험난한 현실에서 그런 꿈이라도 가져야지, 그게 왜 문제가 돼? 그렇게 따집니다. 문제는 우리가 ‘네 잎 클로버’에 매달리느라 ‘세 잎 클로버’를 잊어먹을 때부터 생깁니다. ‘인생의 로또’를 기다리느라 ‘일상의 로또’를 놓치는 격이니까요.

 집으로 가는 길, 생각에 잠깁니다. 종교에도 클로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깨달음을 좇습니다. 그걸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일종의 ‘네 잎 클로버’라고 생각합니다. 한 방에 ‘꽝!’ 하고 깨달음이 오면 모든 문제가 절로 풀릴 거라 여깁니다. 실제 적잖은 수좌들이 선방에서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수도원의 수도승들도 그리스도와의 대면을 고대합니다. 그러나 본성을 깨닫는 순간도, 그리스도와의 대면도 ‘네 잎 클로버’를 통해선 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깨달음의 정체, 그리스도의 속성은 ‘네 잎 클로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뭘까요. ‘세 잎 클로버’입니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반격합니다. “그야말로 혁명적인 붓다의 깨달음이 어떻게 ‘네 잎’이 아니고 ‘세 잎’인가” “그리스도는 초월적 존재다. 어째서 ‘네 잎’이 아니고 ‘세 잎’인가.” 이렇게 반문합니다.

 가만히 따져보세요. 결국 문고리를 찾는 일입니다. 붓다의 깨달음이든, 그리스도의 현존이든 만나려면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 문고리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들은 우리의 일상을 벗어난 곳에서 그 문고리를 찾습니다. 뭔가 특별한 사막, 첩첩산중의 토굴, 히말라야 설원을 찾아다닙니다. 그건 우럭을 잡으려고 태평양 한가운데로 가는 셈입니다. 내가 사는 동네의 방파제에서 낚싯줄만 던져도 우럭은 얼마든지 잡히는데 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럼 공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색(色) 속에 있습니다. 코로 맡는 냄새, 눈으로 보는 모양, 손에 잡히는 덩어리 속에 공(空)이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럼 그리스도는 어디에 있을까요. 주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 있습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 겁니다. 창조물 속에 창조주가 깃들어 있듯이 말입니다.

 다들 묻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왜 상대방의 눈을 쳐다볼까. 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겁니다. 음성꽃동네에서 왜 장애인들을 일일이 안아주었을까. 그리스도를 안은 겁니다. 고령에도 왜 지치지 않았을까. 그 대답을 식사를 함께했던 사람이 하더군요. “진정한 네 잎 클로버는 세 잎 클로버 속에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행복도, 붓다의 깨달음도, 그리스도의 현존도 말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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