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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읊조린다,직진하지 않는다…산문시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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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정례의 산문시엔 이야기가 흐른다. 그 이야기는 방향을 틀거나 거꾸로 거슬러가며 우리네 삶의 슬픔과 고통, 아이러니컬한 감정들을 반추하게 한다. 권혁재 사진전문 기자

 
최정례 시인의 시에는 그가 직접 겪은 이야기가 선명하게 들어 있다. 가장 가까웠던 가족과의 먼 이별, '비현실'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평범한 현실, 그 안에 그가 있다. "그거 아세요? 아직도 '엄마'의 '엄'자만 들어도 눈물이 나려 해요. 엄마랑 특별하게 사이좋은 딸도 아니었고, 불만만 많은 딸이었는데…." 지난해 엄마를 떠나보낸 그는 한동안 시를 쓸 수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와 시아버지의 장례식, 아버지의 요양원 생활 등 그의 나이에 겪을 수 있는 깨알 같은 일상이 영상처럼 '번쩍' 하고 나타났다 '번쩍' 다시 사라진다. 하지만 그 잔영의 자리는 우물처럼 깊고 무겁다. 그의 시는 거기서 다시 시작한다. 그 잔영의 자리를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은 서늘하다.

그의 시 '이 길 밖에서'를 보자. 병원에 누운 엄마에게 "엄마 내가 왔어. 나를 알아볼 수 있어?"라고 묻던 딸은 어느새 세상을 떠난 엄마의 짐을 정리하고 있다. "아픈 몸으로 된장은 왜 담가서 항아리마다 채워놓고"라며 투덜거리고 "코트와 두루마기는 수선하면 입게 될까"하고 묻는다. "그것이 누구의 이야기든, 센티멘탈하게 흘러가겠지"라는 대목엔 '슬픔'이 '슬픔'이 되는 것을 애써 거부하고자 하는 의지가 묻어나 있다.

예심위원인 문학평론가 조재룡씨는 "최정례는 능글맞은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이야기를 짊어지고 가면서도 결코 직진하지 않는다. 직진을 방해하고 자꾸 회전하게 하는 공간을 만들어 넣는다. 그냥 '산문'이나 '에세이'와는 다른, 산문시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고 말했다.

타국땅에서 만난 손톱만 한 꽃, 달개비를 소재로 쓴 시 '닭의 실루엣'도 마찬가지다. "이 꽃을 한국에서는 칵스 대디라고 불러…닭의 애비, 달개비"라며 외국인 친구에게 설명하다가 그는 "달개비 꽃이 어찌하여 닭의 애비가 된 것일까"하고 묻고, 이야기는 어느새 우리들의 '애비'얘기로 점프한다. "저녁이면 깜빡 기절했다가 다시 일어나 나갔던 이들, 자신도 모르게 점점 작아져서는 요양원에 멍하니(중략) 시냇가 습기 많은 둔덕에서 갑자기 아버지들이 손을 흔든다…." 조씨는 "그의 시에 엉뚱하게 끼어든 듯한 이야기가 보이지만 그냥 끼어든 것은 없다. 최 시인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냉철하게 이야기를 제어해나간다"고 말했다.

최 시인은 지난해 미당문학상 심사 때 강력한 후보로 주목받았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현실의 조각들을 이어 맞춰 또 하나의 현실로 끌어올리는 시법"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이렇듯 산문이 어떻게 시가 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묻고 답하며 산문시의 모험을 밀어 붙여온 그는 이제 산문시로 꽉 채운 시집 한 권을 세상에 내놓을 예정이다. 그는 "산문과 같은 문장으로도 충분히 시적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면서도 "하지만 틀에 갇히는 것은 싫다. 더 새로운 형식에 끌리면 다시 변화를 시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시 '해삼 내장 젓갈'에는 여전히 시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자신을 단단하게 담금질하는 그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나저나 나는 시 같은 걸 쓴다. 별로다. 나는 시 같은 걸 쓰지 않는다. 그것도 별로다. 한밤중이다. 그건 괜찮다…."

이 길 밖에서

만약 너의 엄마가 어깨에는 링거줄이, 코에는 음식물을 밀어 넣는 플라스틱 줄이, 하체에는 소변 줄이 매달려 있다면, 소리 없이 액체가 흘러내리면서 내부가 외부로 흘러 해체가 진행중이라면, 무슨 진지한 사건이나 물건을 대하듯 간호사와 의사가 근엄하게 오가고, 소독복으로 갈아입은 네가 침대 곁으로 가서 망각으로 가는 길을 좀 늦춰보려고, 이렇게 말을 하게 된다면. "엄마 내가 왔어. 나를 알아볼 수 있어? 눈까풀을 깜박여 봐. 고개를 끄덕여 봐" 반응 없는 대상을 향하여 옛날 얘기를 들려주듯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마을에 살았어요, 평범한 가족들과 평범하게 살던 평범한 사람의 육체가 여기 누워 있어요, 라는 식으로 너는 너의 엄마를 오브제로 볼 수 있겠니, 객관화 할 수 있느냔 말이야.

지난주에 막 떨어지려고 하던 잎들은 다 떨어지고, 엉켜서 엎어져 있고, 바람에 날리던 것들이 흙 속으로 기어들어가 각각의 원소로 바뀌려 하고, 사실이 비사실로 변해가던 잠깐 사이, 눈으로는 창밖 나무들의 나라를 헤매고, 이것은 상상한 세계인지도 몰라, 상상이 눈앞에 비현실처럼 펼쳐지는 거야, 생각을 잠깐 펼쳤다 가는 것처럼 이 계절은 텅 비었다가 다시 가득 채울 거야.

누워 있는 식물인간들, 우리 그럴 가능성이 있지. 그런데 그게 바로 너 자신이라면? 네 핏줄이라면? 엄마가 살던 집을 팔아 없애야 하고, 살림살이, 옷가지, 고물상이 와서 무게로 달아가게 내버려두고, 버리는데 돈이 더 드네. 한심해서 너도 몇 가지 주워들겠지. 식물된 사람이 입었던 코트, 스카프, 자줏빛에 초록 안감을 댄 두루마기, 식기 몇 개, 다들 집은 좁은데 김치 냉장고는 누구네 집으로 치워야 하나, 아픈 몸으로 된장은 왜 담가서 항아리마다 채워놓고, 오래된 맷돌, 이건 장식용 골동품인데 아깝지만, 쓰다만 양념들, 참기름, 들기름은 오래 돼서 버리고, 코트와 두루마기는 수선하면 입게 될까.

그것이 누구의 이야기든, 센티멘탈하게 흘러가겠지. 센티멘탈 저니, 이 길 밖으로 벗어날 수 있을까, 벌떡 일어나 나간다 하더라도, 갈 데도 없고, 갈 길도 모르겠고, 그런데 내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내 삶은 빤히 알고 있겠지, 지금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빤히 바라보겠지, 이 길 밖에서 올빼미 눈 같은 것을 번득이면서.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최정례(59)=1955년 경기 화성 출생. 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햇빛 속에 호랑이』 『레바논 감정』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등. 이수문학상·현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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