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식의 야구노트] 한국 홈런에 하이파이브 한 일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한국의 황재영(오른쪽)이 일본과의 국제그룹 준결승에서 2-2로 맞선 6회초 결승 솔로 홈런을 터뜨린 뒤 다이아몬드를 돌던 중 일본의 유격수 우에시마 하야토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일본 선수들은 최종 결승전에서 한국을 응원했다. [윌리엄스포트 AP=뉴시스]

25일(한국시간) 끝난 제68회 리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은 한국 대표팀(서울 연합팀) 차지였다. 29년 만에 거둔 기적 같은 성과였다. 그게 다가 아니다. 이 대회에선 더 많은 챔피언이 탄생했다. 미국그룹 우승팀이자 최종 결승에서 한국에 진 재키 로빈슨 웨스트(JRW·시카고 연합팀)도 챔피언이라 부를 만하다.

 JRW 선수들이 25일 시카고로 돌아가자 공항에는 수백 명의 팬들이 나와 이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람 이매뉴얼 시카고 시장은 “이들은 우리의 긍지”라며 27일 성대한 축하행사를 열기로 했다.

한국 유니폼 입고 응원 온 일본선수들

 JRW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1919~72)의 이름을 딴 팀이다. 시카고 지역의 가난한 소년들을 모아 팀을 만들었다. 선수 13명은 물론 감독과 코치 모두가 흑인이다. 중산층 이상의 백인 소년들이 주로 즐기는 야구를 흑인 소년들도 즐길 수 있게 해주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를 지원하는 지자체 법안이 15년 전 통과됐고, JRW는 이번 대회에서 그 결실을 맺었다. JRW는 두 차례 패자부활전을 거친 끝에 극적으로 미국그룹 우승을 차지했다.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18)이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으로 미국은 심각한 인종 갈등을 겪고 있다.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집권해도 인종 갈등의 뿌리는 남아 있다. 미국은 재키 로빈슨이 다시 필요했는지 모른다. JRW는 어른들이 부끄러울 만큼 멋진 야구를 했다. 가난하고 차별받는 그들이 야구를 통해 말했다. 하나가 되자고, 더 나아진다는 희망을 갖자고.

첫 여자 승리투수가 된 데이비스

 챔피언은 또 있다. 필라델피아 연합팀의 투수 모나 데이비스다. 만 12세인 이 소녀는 지난 15일 내슈빌 연합팀과의 경기에 선발 등판해 6이닝 동안 삼진을 8개나 잡아내며 완봉승을 따냈다. 여자 선수가 승리투수 기록을 세운 건 68년 대회 역사상 처음이다.

 과거에도 몇몇 소녀들이 리틀야구에서 뛴 적이 있다. 그러나 실력으로 팀원이 됐고, 승리투수가 된 건 데이비스가 처음이다. 그의 스토리는 유명 주간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 커버를 장식했다. 많은 여자 선수들이 그렇듯 데이비스에겐 야구를 하는 것부터가 시련이었다. 소프트볼 선수였던 그가 야구팀 입단을 희망하자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데이비스는 그들에게 굉장한 실력을 보여줬다. 그는 최고 시속 70마일(약 112㎞)의 빠른 공과 현란한 포크볼을 던지며 남자들과 경쟁했고 이겼다.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인 미셸 오바마는 SNS를 통해 “리틀야구에서 첫 완봉승을 따낸 데이비스에게 축하를 보낸다. 소녀들이 성공할 때 우리 모두 성공하게 된다”고 격려했다. LA 다저스의 공동 구단주인 매직 존슨도 “누가 여자는 야구를 못할 거라고 했는가”라고 말했다. 소년을 이긴 소녀, 데이비스가 야구를 통해 말했다. 용기를 내보라고. 도전해 보라고.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일본과 두 차례 만났다. 흔히 말하는 한·일전. 국제그룹 준결승에서 4-2로 이겼지만 국제그룹 결승에서 또 만나자 코칭스태프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한·일전이라면 제기차기를 해도 이겨야 한다는 게 어른들 생각이었다.

 소년들은 그저 신나게 게임을 즐겼다. 일본 선수들을 만나도 친구처럼 어울렸다. 첫 일본전에서 황재영이 결승홈런을 때리자 일본 내야수들이 하이파이브를 해줬다. 상대팀이라도 홈런을 쳤을 때 축하하는 리틀야구의 관행이 한·일전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두 번째 대결에서도 한국이 12-3으로 이겼다. JRW와의 최종 결승전 때는 일본 선수들이 관중석에 모여앉아 한국을 응원했다. 그들은 한국과 일본의 선수 이전에 두 번이나 함께 경기장을 누빈 친구였다. 한국과 일본 소년들은 야구로 말했다. 스포츠는 싸우는 게 아니라 배우는 거라고.

 어른들의 월드시리즈는 10월에 열린다. 미국 프로야구 결승전을 월드시리즈로 부르는 건 미국인들의 오만이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리틀리그 월드시리즈라는 명칭 역시 처음엔 어색하게 들렸다. 그러나 전 세계의 소년·소녀들이 모여 야구하는 걸 보고, 그들이 전한 메시지를 접하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거기엔 희망과 도전, 용기와 성취, 존중과 조화가 있었다. 이게 진짜 월드시리즈다. 리틀야구에서 어른들이 배웠다.

김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