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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30만 넘던 가양주 기능인, 일제 때 10여 명으로 줄어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일 오후 정여창고택 옆 솔송주 문화원이 자리한 경남 함양의 개평마을엔 가는 비가 내려앉고 있었다. 찹쌀에 솔잎, 봄에 나는 솔순으로 빚은 솔송주의 단아한 향이 비가 만든 습기에 섞여 조용한 한옥마을을 감싸 안았다. 경남 무형문화재 박흥선 명인이 문화원 마루에 단촐한 술상을 차렸다. 단번에 삼키기엔 아쉬운 향이 대청마루를 가득 채웠다. 김춘식 기자

요즘 대학생들은 ‘막사’를 마신다. 막걸리에 사이다를 넣어 맛을 달달하게 한 것이다. 다음날 뒷골이 당긴다. 술이 덜 숙성돼 그렇다. 전통술의 대명사, 막걸리의 현실이다. 그럼 우리 전통술은 어땠을까. 당연히 달랐다. 그러나 우리 술의 근대사는 뒤틀린 운명을 강요했고 지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전통술은 고장의 좋은 물과 누룩, 쌀로 빚었기 때문에 맛과 향이 좋고 웬만큼 마셔도 몸이 개운했다. 그래서 적당히 마시면 건강에 좋고 국산 원료를 사용하여 안전했다. 한국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이 전하는 집안 일화가 재밌다.

 “조부모님은 점심·저녁에 한 대접씩 술을 마셨다. 매일 즐겼어도 85세까지 건강히 사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술을 드신 다음 날 꼭 힘들어했다. 40대부턴 고혈압·당뇨 같은 걸 앓으셨다. 하지만 술 잘 빚는 동네 할머니의 술을 드시면 다음 날 가볍고 좋다 하셨다.”

 우리 술의 기본은 물·누룩·쌀이었다. 박 소장은 “우리 술에 관한 책은 80권 가까이 되는데 다 주원료는 쌀로 기록한다. 이게 수수로 빚은 중국, 멥쌀로 빚은 일본과 다른 점이다. 주곡으로 술을 빚는 것은 우리밖에 없었다”고 했다.

 주곡인 기장·조·쌀 같은 곡식과 누룩으로 빚는 한국의 문화는 삼국시대에 이미 형성돼 있었다. 고구려 여인의 사연이 얽힌 ‘곡아주(穀蛾酒)’ 전설(『태평어람』), 멥쌀로 빚은 ‘신라주’(『해동역사』), 주국(酒麴)과 맥아(엿기름)를 이용한 백제의 감주 발효법(『주서』)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백제인 인번(仁番)이 일본에 전한 술은 오진(應神) 일왕(270∼310)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일본인은 그를 ‘주신(酒神)’으로 모셨다(『고사기』).

 고려 때는 술이 만개했다. 국산으론 청주·법주(왕의 술)·탁주(민간)가 주류였고, 여기에 조구이화주·오가피주·녹파주·국화주·창포주·황금주·백자주·죽엽주 같은 다양한 술도 곁들였다. 행인자법주·계향어주·마유주·백주·포도주 같은 외래주도 있었고, 몽골족의 원(元)의 지배는 증류식 소주 제조법을 퍼트렸다. 원의 일본 정벌 전초기지인 개성·안동·제주도는 소주의 명산지가 됐다.

 조선은 술 문화를 숙성시켰다.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 가이드였다. 관혼상제와 사랑채에서의 손님맞이에 술은 빠질 수 없었다. 술 문화는 세련되고 양조기법도 고급화됐다. 쌀 곡주만 850여 종이나 된다(박록담, 『역사의 부침과 함께해온 전통주』).

 조선 후기에는 지방주가 발달했다. 서울의 약산춘, 전라도 여산의 호산춘, 충주의 노산춘 등 춘주류(春酒類), 평안의 벽향주, 김제 충주의 청명주, 제주의 초정주, 한산의 소국주 등이 유명했다(장지현, 『우리나라 전통주의 역사』). 서울을 중심으로 근교에선 약주, 이남에선 탁주, 이북에선 소주가 주로 소비됐다(조재선, ‘한국발효식품연구’).

 전통술은 일제 강점기 때 몰락했다. 일제는 1909년에 식민지 재정 확보를 위해 ‘주세 부과’와 ‘주조 면허제’를 골자로 하는 주세법을 시행했다. 1916년엔 세율을 인상했다. 그리하여 전체 조세액에서 주세의 비중이 1910년 1.8%였다가 1934년에는 29.5%로 지세(26.3%)를 제치고 1위가 됐다.

 또 한국식 주조장과 ‘일본식 개량 누룩’ 제조장을 통합시켰다. 그 과정에서 1916년 30만 명이 넘던 가양주(집에서 담는 술) 주조자가 1930년께 10여 명으로 격감했다. 1934년에는 가양주 면허제도를 폐지했다. 수천 종 향토주와 증류식 소주가 자취를 감추게 됐다. 그 자리를 일본 청주·맥주, 일제가 도입한 저급·저가 주정의 소주, 일반 민중이 몰래 만든 탁주가 대신 들어섰다. 오늘날 우리가 대중적으로 마시고 있는 희석식 소주와 값싼 막걸리는 일제의 ‘저가품주의’ 정책으로 만든 슬픈 술이다(이승연, ‘1905~30년대 초 일제의 주조업 정책과 조선 주조업의 전개’).

 해방 후에도 전통술의 시련은 계속됐다. 일제 때 주세법은 여전히 사용됐고, 식량난으로 1960년대에는 탁·약주 제조에 쌀 사용을 금했다. 잡곡에 밀가루·옥수수·당밀 등을 섞어 빚게 했다. 가양주도 못 만들게 했다. 공장에서 술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와 사람들을 취하게 했다. 전통술은 설 자리가 없었다. 경복궁 막걸리학교 허시명 교장은 “전통술은 궤멸됐다”고 했다.

 88올림픽은 숨통을 조금 열어줬다. ‘관광토속주’와 ‘민속주 기능보유자’가 처음 지정돼 민속주 50여 종이 재현되고 개발·보급이 시작됐다. 업체도 2001년 민속주 46개, 농민주 81개 등 129개에서 2010년 현재 민속주 57개, 농민주 412개 등 총 469개로 늘었다.

 주류 규제완화도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1990년 주류도매면허 개방·쌀막걸리 제조 허용이 시작돼 1998~2000년 막걸리 신규 면허제한 폐지, 주류 제조 시설기준 완화, 주조사 의무고용제 폐지, 주류 판매업 면허요건 완화, 민속주 및 농민주 통신판매 허용으로 이어졌다(이동필, ‘한국의 주류제도와 전통주 산업’).

 그렇지만 전통술은 여전히 허덕이고 맥은 이어지지 않고 있다. 다음 3인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양조가 노영희씨가 자연의 단맛을 재현한 자희향의 양조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춘식 기자

 지난 20일 찾은 경남 함양 개평마을 명가원.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 때부터 담기 시작했다는 솔송주의 고장이다. 일제 때 맥이 끊기지 않은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가양주로만 전해지다 16대손 정천상 회장과 박흥선 명인이 1996년 주조 허가를 받으면서 대량 생산에 성공했지만 명인은 뜻밖에 “너무 힘들다”고 한다. “주위에서 시어머님께 맛있는 술을 많이 담가보라고 한 게 고생의 시작이었다. 항아리에 조금씩 하던 것을 크게 하니 고른 품질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작은 항아리는 온도 조절도 됐지만 대량으로 하니 곧잘 쉬어버렸다. 저온에 발효하면 부드럽고 깊은 맛이 나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판로 확보도 골치가 아팠다”고 했다. 누룩내도 문제였다. 젊은이와 외국인이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탁주는 할수록 손해여서 중단했고 전통술만으론 안 돼 복분자주 개발에도 뛰어들었다. 7년 적자 끝에 겨우 숨을 돌리고 지금 10년째 맥을 이어간다.

 우연한 기회에 마신 막걸리에 매료돼 전통술에 뛰어들었다는 노영희 대표도 허덕인다. 지난 20일 그의 회사가 있는 전남 함평을 찾았다. 이 회사에서 만든 자희향은 국향대전에서 인정받아 삼성 이건희 회장의 만찬주로 지정됐다. “국향대전은 격과 작품성이 있는 축제여서 품격 있는 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술을 잘 빚는 지역 종가를 다니며 술을 다 맛을 봤지만 다들 유원지 동동주 맛이었다”며 “전통주 제조 과정이 전혀 매뉴얼화돼 있지 않았다. 얼마나 몇 도에서 숙성시킬지도 없고, …저온 저장시설이라고 찾아보니 와인용이었다”고 했다. 국세청 기술연구소에서 6개월간 교육까지 받았다. 그래도 그 레시피대로 하면 시중 막걸리가 나올 뿐이었다. 실패했던 술이 몇 백 항아리인지 모른다. 그렇게 5년 고생 끝에 겨우 성공했다.

 술 빚는 법을 찾아 13년간 전국을 다녔다는 박록담 소장의 설명이다.

 “맥주·와인·막걸리 전문가는 많아도 우리 술을 가르쳐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술 산업이 일본 술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막걸리 연구자도 마찬가지다. 누룩으로 빚는 시골 술을 전공한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 독학해야 하는데 와인·맥주로 공부를 하면 기본적 주조 과정은 꿴다 해도 우리 누룩 공부는 여전히 안 된다. 일본에는 미생물을 비롯해서 모든 정보가 다 정리되어 있어 이를 베껴다 만든 걸 우리 술로 알고 마시고 그 다음 날 숙취에 시달려 온 것이다. 시중의 막걸리·동동주·희석식 소주의 95%가 일본식으로 주조한다.”

 전통주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경남무형문화재와 대한민국식품명인 보유자인 박흥선 명인은 “지금 한국 술은 아사 직전”이라고 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2011년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자금 부족 20.5%, 판매 부진 18.5%, 시설 낙후 15.3%, 노동력 부족 및 인건비 부담 14.3%의 순으로 경영상 어려움이 있다고 답했다. 또 한국인의 36.4%가 술을 주 1~2회, 32.9%가 월 1~2회 마신다. 희석식 소주(39.4%)와 맥주(35.7%)가 1, 2위이고 3위는 막걸리지만 13.9%에 불과하다. 수입 와인(3.2%)·양주(1.8%) 소비도 전보다 줄었다지만 국산 과실주(4.9%), 약주·청주(0.6%), 증류식 소주(0.4%)는 거의 안 마신다.

 다만 가능성이 닫힌 것은 아니다. 연구원의 응답자 가운데 94.5%가 “전통술을 마셔봤다”고 했고 68.1%가 “만족한다”고 했다. 뭔가를 잘만 하면 멀어진 소비자를 돌아서게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프랑스 에섹(ESSEC) 경영대학원의 데니스 모리셋 교수는 “명품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희소성과 사람을 꿈꾸게 하는 힘이다. 역사와 문화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다.

 청와대나 대사관·기업 등의 만찬주로 와인만 마실 게 아니라 전통주를 더 폭넓게 활용하는 것도 좋다. 우리 술에 왜 명주가 없느냐고 탓하는 것은 섣부르다. 우리 술에도 수백 년의 맛과 전통을 이어온 중국의 마오타이주, 일본의 사케, 영국의 위스키, 프랑스의 와인·코냑과 비교해 손색이 없는 것이 물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브랜드화할 건가는 끊임없는 품질향상 노력과 국민의 관심, 그리고 국가의 의지에 달려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술이 지역축제·관광·예술 등과 결합한 고부가가치 문화상품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온라인 중앙일보 · 이승률 아산정책연구원 인문연구센터 연구위원 sungryul1@asaninst.org
취재지원=권희연 아산정책연구원 인턴, 신희선ㆍ오수린ㆍ이서영ㆍ이영경ㆍ홍예지 아산서원 알럼나이 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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