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오는 원효의 행적, 사실과 거리 멀다"-동국대 김영태 교수 연구 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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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신라의 고승 원효가『군직자 혹은 군 출신이었다』거나,『29세 때 출가했다』거나,『입당구법 길도 증 고가에서 촉복수(해골 물)를 마셨다』 거나 하는 이제까지 알려진 행적이 사전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새로운 연구논문이 발표돼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같은 주장은 동국대 김영태 교수(불교사)가「불교 학보」 17집에 발표한 논문『전기와 설화를 통한 원효 연구』에서 제기됐는데 이 논문은 원효의 실상이 매우 왜곡돼었다고 주장하여 파문을 던지고있다.
원효는 서기617년(진평왕 39년) 에 태어났다. 그의 아명은 석당(서당)이었으며 자라서는 신당이라 했는데 김 교수에 따르면 이「가신」이라는 이름이 공교롭게도 신라 군호「가신」과 같아 원효가「가신」의 군직의 경력을 가졌거나 군문에서 활동한 사실이 있는 것처럼 알려져 왔으나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가신」은 군직인 군관명이 아니고 군부대명일 뿐이며 어렸을 때의 이름과 일치한다고 해서 그를 가신이라는 군대에 복무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원효가 아명을 가신으로 했다가 커서는 신명으로 한 내막을 알만한 자료로서 『삼국유사』 원효 부협 조를 들었다. 이에 의하면 『원효는 신라 압량군 남쪽(지금의 경북우산군 자인면) 불지촌(혹은 발지촌이라 하며 이언에 불등을촌이라함) 율곡 사나수 아래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임신하고 달이 찼을 때 이곳의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산기가 급하므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그 밤나무에 걸고 그 밑에 자리를 마련해 해산했다. 따라서 그 나무를 사나수라고 했으며 이 나무에 달리는 방은 유달리 커서 사나율이라고 했다』고 되어있다.
사나수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털옷을 벌려 건 나무」이므로 사는 가사란 글자지만 결국 털옷(모의) 이란 뜻이라는 것이다.
특히 스님이 아니었던 원효의 아버지 옷이 스님들이 입는 가사일 수가 없다는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 교수는 당시 첩자는 속어로 털이라고 했으며 털옷을 걸어 놓은 나무 아래서 낳았기 때문에 아기의 이름을 가신이라 지었다고 풀이했다.
원효의 출가시기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29세라고 명기하고 있는 사실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에 의하면 원효의 출가 연대를 전하는 현존문헌은『송고 참전』(원효전)뿐이다. 여기에는 원효가『양쪽으로 머리를 올려 묶은 나이(묘채 지년)에 불법으로 들어갔다』고만 전했을 분이다. 그러므로 원효는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 29세라는 단정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신라 때에는 남자가 15세가 되면 머리를 양쪽으로 올려 묶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원효의 출가연도를 15세 전후로 보는 것은 무리가 없겠지만 29세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원효가 15세 되는 시기에는 화랑의 활동이 왕성했던 때였으며 화랑도들의 나이가 15세 안팎이었다는 점은 원효의 출가 나이를 연관시켜 보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한 국사학자는 말했다.
원효는 45세 때(661년)에 두번째로 해로를 통해 입당코자 백제 땅이었던 항구로 향해 가는 도중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구법의 길을 포기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원효가 고분에서 크게 깨달은 기록에 대하여서는 지나칠 수 없는 잘못이 있다고 김 교수는 주장한다.
송고해전(의상전) 에는 원효가『비오는 밤에 망막(토감)인 줄 알고 들어가 편히 잠을 잤으며 다음날 그 곳이 망막이 아닌 오래된 무덤임을 알고 하룻밤을 지내다가는 귀신의 동티를 만남으로써 심법을 크게 깨쳤다』고 전한다. 그런데 오늘날 원효를 언급하고 있는 모든 글에서 원효가 해골 물(촉박수)을 마셨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의 근거를 김 교수는『석문림문록』에 있다고 본다. 임문록에는『해동인 원효가 배를 타고 당에 이르러 혼자 황폐하 언덕을 가다가 무덤사이에서 자게됐다. 갈증이 심해 굴속의 샘물을 먹었더니 달고 시원했다. 날이 새어보니 그것은 해골이었다. 모두 토해 버리려다가 문득 깨말아 단식하기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감하면 해골이 둘이 아니다(심우칙종칭법생 심감칙해영상)하고는 다시 스승을 구하지 않고 신라로 돌아갔다』고 기록돼 있다.
김 교수는 그러나 임문록에 실린 이같은 원효 이야기는 다분히 사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임문록은 일종의 문집으로서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는 사료로 인정받을 수 없으며 원효에 대해서도 당에 간 적이 없음에도 당에 간 것으로 기술하는 등 이미 잘못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끝으로 수사인물의 생애와 전기는 확실한 사료에 근거해 정확한 해석으로 정리해야 하며 이미 왜곡된 부분이 밝혀진 이상에는 이에 대한 시정도 빨리 이뤄져야 할 것임을 주장했다.
원효의 생애와 전기, 그리고 일화에 대한 김 교수의 재평가는 그동안 학계에서 제기돼왔던 원탁 군인신분 논쟁에 새 판도를 설정하는 것으로 보고있다.
김 교수의 이번 논문은 또 지나치게 세속화·허구화돼가고 있는 원효의 일화수용에 제동을 거는 것으로도 뜻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안길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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