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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성지서 신자 500명과 일일이 악수 … 셀카도 흔쾌히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16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시복미사에서 윤지충(바오로)을 비롯한 124위의 걸개그림이 공개됐다. 그림 제목은 ‘빛을 여는 사람들’로 복자들은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 또는 십자가를 들고 있다. 그림은 김영주(이멜다) 화백이 그렸다. [사진공동취재단]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려고 모인 가톨릭 신자와 시민들은 90만 명(경찰 추산)에 달했다. 16일 시복식 미사가 치러진 서울 광화문과 서울시청 앞 광장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교황은 이날 오전 9시 서울 중림동의 서소문 순교성지 참배를 마치고 광화문에서 2시간 가까이 시복식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 직전 사방이 뚫린 차량을 타고 느린 속도로 천천히 이동하며 30분 동안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가톨릭 신자와 시민들은 울고 웃으며 교황을 맞았다.

“윙크하며 제 손을 꼭 잡아주시는데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너무 기뻐서 ‘사랑합니다’라고 외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뒤편에서 쪽방공동체를 운영하는 김주미(55) 원장은 쪽방 사람들 열댓 명과 함께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 앞 첫째 줄에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손을 붙잡는 교황의 미소에 눈물이 터졌다고 했다. 인천에서 온 백발의 이단규(83) 할머니도 “성당에서 날이 더우니 노인들은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가슴이 쿵쾅거려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항상 낮은 곳을 살피시는 교황을 꼭 뵙고 싶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어려운 시대 … 말 없어도 진심 통해”

서소문 순교성지와 124위 시복미사 현장을 찾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슴 속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세월호 침몰과 28사단 윤 일병 구타 사망 사건 등으로 마음을 다친 사람들은 교황의 미소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고 입을 모았다. 장애가 있는 딸과 함께 온 조계숙(51)씨는 “약한 사람을 다독여주시는 모습에서 깊이 감명받았다”고 했다. 시민 배창섭(54)씨는 “시민들의 마음속에 영웅이 절실한 시점이다. 곧 한국땅을 떠나시겠지만 긴 여운을 남기시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교황의 미소만으로도 위로받은 사람도 많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광화문에서 미사를 올리던 최미순(53)씨는 “특별히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랑은 눈에서 눈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 아니겠는가. 교황님을 보면 ‘저분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라는 게 느껴진다”고 했다.

 교황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16일 오전 서소문 순교성지에서는 인근의 가난한 사람들을 초청해 그들의 손에 입을 맞췄다. 신자 500명과 일일이 악수하며 ‘셀카’ 촬영에도 응해줬다. 누군가 어린 아이를 들어올리면, 그 말랑말랑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현양탑 앞에서 참배를 마친 교황은 검은색 ‘쏘울’ 차량으로 서소문로를 통과한 뒤 시청 앞에서 사방이 뚫린 차로 갈아탔다. 서울시청 앞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지는 1㎞ 구간에 양방향 두 개 차로를 제외하곤 모두 사람이 들어찼다. 교황은 도보 속도로 달리는 차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종종 멈춰 서서 아이들의 이마를 짚어주기도 했다.

 광화문광장을 한 바퀴 돌아 세월호 피해자 가족 400명 앞에 다다르자 교황은 차에서 내렸다. 34일째 단식 농성 중인 김영오(57·고 김유민양의 아버지)씨의 손을 맞잡았다. 김씨는 교황의 손에 입을 맞췄다. 이어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특별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 세월호를 절대 잊지 말아 달라”고 교황에게 부탁했다. 교황은 손을 놓지 않고 그의 말을 들었다. 그 뒤 김씨가 건넨 노란 종이의 편지를 받아 우측 주머니에 넣었다. 김씨는 교황의 옷깃에 꽂힌, 세월호 희생자 추모의 뜻이 담긴 노란 리본 모양의 배지가 비뚤어져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세워줬다. 교황 시선 너머로 ‘We want the truth(우리는 진실을 원한다)’ ‘철저한 진상규명’ 등의 문구가 적힌 노란 수건들이 겹겹이 펼쳐졌다.

 차에 오른 교황은 잠시 침묵했다. 차가 출발하자 교황은 다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30분의 퍼레이드를 마치고 붉은색 제의로 갈아입은 교황이 단상에 올랐다. 붉은색 제의는 순교와 피, 성령을 상징한다.

시복 대상 124위도 평신도들

이날 오전 시복식을 통해 복자(福子)·복녀(福女)로 추대된 124위는 대부분 평신도다. 교황이 직접 순교자의 땅을 찾아가 시복식을 집전하는 경우는 전례가 드문 일이다. 평신도를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확산된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교황이 기리는 것이란 해석도 있다. 시복 강론에서 교황은 “순교자들이 선택한 종교(천주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과 순교자들의 연대 의식”을 언급하며 “순교자들의 유산은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영감을 불어넣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와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중림동 약현성당 이준성 주임신부는 “순교 정신은 자유와 사랑, 평등에 바탕을 하고 있다. 순교에는 양심의 자유와 모든 사람을 품는 나눔의 사랑, 신분제를 뛰어넘는 평등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며 순교자들의 시복을 기뻐했다. 천주교 선구자인 이승훈(베드로)의 후손 이태석 신부도 “천주교 초기 순교자들의 터를 찾은 것은 그들의 순교가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천주교라는 큰 숲이 조성되기까지 보통의 평신도들이 씨앗 역할을 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교황의 사랑에 신자들은 감동으로 화답했다. 광화문에서 새벽 1시부터 교황을 기다렸다는 서지윤(29)씨는 “서민의 손을 잡고 기도하는 교황의 모습을 조금 더 앞에서 보기 위해 이곳에서 밤을 새웠다”고 말했다.

아이 입에 손가락 넣는 장난도

교황은 이날 오후 충북 음성 꽃동네를 찾아갔다. 그는 몸이 불편한 이들을 일일이 끌어 안고 쓰다듬었다. 80명 가까이 됐지만 한 명 한 명을 살폈다. 한 어린이가 손가락을 입에 넣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손가락을 그 어린이의 입에 넣어 보기도 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는 꽉 끌어안아 자신을 만지도록 하고,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는 이들에게는 양 볼을 감싸주기도 했다. 얼굴을 들이밀면 볼을 맞댔다.

 환한 미소를 보이며 웃던 교황은 시복미사 때에는 엄숙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 누구보다도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다산 정약용의 직계 종손 정호영(54)씨는 “교황은 유쾌하면서 동시에 진지한 분이다. 원칙을 중시하고 또 그 원칙을 지키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저녁 꽃동네에선 태양이 마구 도는 듯한 기현상을 봤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오후 6시10분부터 서쪽 하늘의 태양이 마치 좌우로 도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교황을 알현하고 돌아가던 신자들은 “태양 테두리의 빛이 20분가량 회전했다” “갑자기 어두워졌다 밝아진 뒤 보랏빛을 띠며 좌우로 돌았다”며 “교황 방문을 하느님이 축복하고 있다. 기적이다”라는 말을 연신 쏟아냈다고 한다. 기상청 관계자는 “태양 테두리가 도는 현상은 기록된 적이 없고 이 같은 문의도 처음”이라고 답했다.

유재연 기자, 박종화·차길호·황은하 인턴기자

[사진 공동취재단,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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