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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청화백자는 유럽 명품 자기에 어떻게 스며들었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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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호 14면

주부들에게 거금을 주고 도자기를 사라고 하면 어떤 도자기를 고를까? 고려 청자나 조선 백자일까? 아마 열에 아홉은 마이센이나 로열 코펜하겐 같은 유럽 명품 브랜드 디너 세트를 택할 것이다. 사실 유럽 자기는 동양의 전통문화가 서양에서 발전적으로 계승된 산물이다. 아름다운 겉모습에만 매료되어 그 뿌리가 우리 청화백자에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 온 건 국내에 유럽 자기에 대한 연구가 일천했던 탓이다.

『유럽 도자기 여행』 책 펴낸 조용준씨

유럽의 유명 가마를 발로 확인하며 명품 자기 브랜드의 역사와 현재를 충실히 기록한 최초의 국내서『유럽 도자기 여행-동유럽편』이 최근 출간됐다. 도자기 전문가가 아닌 여행 전문가의 손에서 나온 점이 뜻밖이다. 오랜 기자생활을 접고 4년 전부터 유럽 문화여행 전문 저술가로 활동하며 『펍, 영국의 스토리를 마시다』『프로방스 라벤더로드』를 출간한 조용준(53)씨다. “내 책을 쓰고 싶은 욕망 때문에 기자를 그만뒀고, 평생 최고로 행복한 순간을 요즘 맛보고 있다”는 그는 유럽 자기에 매료돼 우리 도자기까지 거꾸로 돌아보게 됐다며, 앞으로 ‘서유럽·북유럽 편’을 거쳐 우리 도자기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모색까지 포함한 ‘한중일·동남아편’까지 집필할 계획이다.

1 사자 모양의 뚜껑 손잡이가 달린 마이슨의 청화백자 화병. 2010년 창립기념으로 제작됐다

애초에 그를 사로잡은 건 ‘푸른 색’이었다. 오래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를 여행할 때 주요 건물들이 죄다 파란 타일 지붕을 얹고 있었던 것. “저 파란 타일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궁금증이 일었고, 그 이래로 파란 타일을 유심히 살펴오다 어느 날 같은 색 도자기를 만났다. “우연히 잡지에서 본 에르메스의 ‘블뢰 다이외르’가 바로 그 색이더군요. 타일과 도자기의 접점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마이센의 대표문양인 ‘츠비벨무스터’까지 관심이 미치게 됐죠. 그 푸른 빛이 사실 청화백자 색인데 부끄럽게도 처음엔 그 매력을 몰랐어요.”

책은 동유럽 5개국을 2년에 걸쳐 수차례 방문한 여정의 기록이다. 유럽 자기의 원류인 마이센을 비롯, 헝가리 헤렌드, 오스트리아 아우가르텐, 체코 체스키, 폴란드 볼레스와비에츠 등을 돌며 각 브랜드의 역사와 현재를 짚고 각 도시의 볼거리와 여행정보까지 담았다.

기자시절 이미 세계 50여 개국을 돌며 여행에 내공을 쌓았지만, 도자기 여행은 녹록지 않았다. 도자기 산지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어 하루 14시간 운전만 해야 할 정도로 취재에 엄청난 시간이 걸렸고, 심층 정보를 국내에서는 전혀 구할 수 없어 자료 조사에도 애를 먹었다. “아마존과 구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에요. 아마존에서 원서를 구입하고 각 나라 사이트를 뒤져 자료를 모았죠. 사이트가 헝가리어, 체코어로 돼 있으니 구글 번역기를 돌려야 했고요.”

서유럽과 북유럽 가마 답사까지 다 마친 지금, 그는 가장 매력적인 브랜드로 헤렌드를 꼽았다. “동양적인 꽃, 나비 등의 문양이 화려한데, 그 화려함이 굉장히 기품있게 느껴집니다. 동양의 문양이 가장 우아하게 반영돼 빛나고 있다고 할까요. 다른 유명 가마들에 비해 100년 이상 뒤처져 시작됐지만 최고로 우뚝 선 역사에도 배울 점이 있고요.”

도자기 여행을 하며 새삼 놀란 건 유럽 도자기 대부분이 왕실 지원에 의해 오늘의 브랜드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실 도자기의 원조잖아요. 만일 우리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면 어땠을까. 첨단기술에서만 국가경쟁력을 찾을 게 아닌데 아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2 독일 뮌헨 지방을 대표하는 브랜드 님펜부르크의 테이블웨어. 3 뮌헨 레지던츠 궁전의 도자기 컬렉션. 4 헝가리 브랜드 졸너이의 에오신 화병. 현란한 색감이 돋보인다. 5 졸너이에서 생산된 아르민 클라인의 인물화 도자기.
6 헤렌드의 동물 피겨린.

유럽 자기를 알게 될수록 분한 마음이 들었다. 중국과 일본 자기가 유럽 자기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는데 비해 우리만 세계 도자사에서 제외된 느낌 때문이다. “드레스덴 츠빙거 궁전에 일본 궁이 만들어질 정도로 유럽에서 일본 도자기가 각광을 받았는데 그 성장 뒷배경은 모른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분했어요. 일본 도자 산업의 뿌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할 필요를 느꼈죠. 그걸 증명할 걸작품이 있어야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데, 그런 부분이 안타까워요. 지금 우리 사정이 어떤가요. 마이센이 청화백자를 본떠 만든 ‘츠비벨무스터’가 인기를 얻자 그 카피 제품을 생산하던 일본 기업이 동일본 대지진 후 경남 합천으로 공장을 옮겼다죠. 일본에 백자기술을 전수한 이 땅에서 ‘일본판 츠비벨무스터’를 만들고 있다니요.”

그는 동양 도자 문화의 전세계 유람 과정을 소개하는 일을 일생의 숙원사업으로 꼽았다. 동양 도자기와 페르시아 코발트블루의 하이브리드 문화가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어 북아프리카로 넘어가고, 북아프리카 나라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면서 서유럽 전역으로 확대된 뒤 중남미에까지 전파된 전 과정을 따라가며 꾸준히 책을 쓰고 싶단다.

전문가도 아닌데 도자기 문화 답사를 ‘숙원사업’으로까지 삼은 이유가 궁금했다. “남자들이 젊을 때는 일과 사랑에 정열을 쏟죠. 그런데 정점에 오르고 나면 한결같이 삶의 즐거움을 찾고 싶은데 어디서 찾아야 할지를 몰라요. 잘 사느냐 못 사느냐보다 더 큰 문제인 것 같아요. 이기적이지만 저는 삶의 즐거움을 여기서 찾은 겁니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조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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