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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밈 없어 더 눈길 가는 … ‘옷보다 여행’의 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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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호 21면

여행가는 건 좋은데 짐 싸기는 마냥 기쁘지가 않다. 출장이든 여행이든 하루하루 완벽한 옷 짐을 마련하던 습관을 가진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패션의 기본은 상황에 맞는 옷차림이라는 강박관념에 빠져 휴양지에선 트로피컬 선드레스를, 해외 인터뷰에선 똑 떨어진 펜슬 스커트를 필수품으로 바리바리 챙겨야 마음이 놓인다. 혹여 갑자기 추울까 더울까, 지울 수 없는 뭐라도 묻을까 예비용 의상까지 생각하다 보니 떠나기 전부터 진이 빠질 때도 있었다.

스타일#: tvN ‘꽃보다 청춘’과 단벌 여행

그래서 이들의 여행이 놀라웠다. 가수 윤상과 이적, 유희열은 처음 모인 자리에서 어디를 가는지, 언제 가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출발은 바로 네 시간 뒤. 밥을 먹다 뛰쳐나간 그들은 부칠 짐도 없는 맨몸으로 비행기에 오른다. 리얼리티 예능 프로 ‘꽃보다 청춘’의 얘기다.

‘묻지마 출발’의 설정은 황당하고 기발하지만 여행지는 다름 아닌 페루다. 하루 사이에도 사계절이 공존하는 기후로 유명하다. 그런 곳에서 여벌 옷 하나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을까. 또 아무리 여행이라도 가는 곳곳 때와 장소에 맞춰 적당히 입어줘야 하는 게 어른 된 도리일 터. 그때마다 어떻게 의상들을 수급해 갈 것인지는 더 궁금한 관전 포인트였다.

옷이 뭐 대수랴 싶겠지만 연예인은 연예인이어도 아무리 고생을 사서 하는 배낭 여행이라지만 카메라 비추는 곳에선 의상에 어느 정도 신경 쓸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꽃보다 할배’ 때도 스타일리스트가 어르신들의 촬영용 의상을 맞춤으로 준비해 입혔던 이유가 바로 그래서 아닐까. ‘꽃보다 누나’ 역시 여배우들의 옷차림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만큼 여행 패션의 교본으로 통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저리 다니진 않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쌍심지를 켜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웬걸. 그들은 정말 차림새만큼은 ‘리얼’이었다. 유희열은 60시간이나 속옷을 갈아입지 못했고(중간에 샤워는 했음에도), 이적은 쌀쌀한 밤바람에도 내내 반바지를 입고다녔다. 윤상이 출발 때 입었던 하얀 셔츠에 얼마나 때가 꼈을지는 상상도 하기 싫다. 결국 이들은 2~3일이 지나서야 3종 세트 삼각 팬티를, 이름 없는 셔츠를, 점퍼를 대신하는 트레이닝복 상의를 사들인다. 그 사이 한 회 내내 같은 옷차림을 고수하는 세 연예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진정성이 넘쳐서, 티셔츠는 점점 더 후줄근해지고 바지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힌다.

보고 있자면 참 멋도 없고 그림도 안 나온다. 그럼에도 그들의 ‘단벌 여행’은 잠시 사고의 전환을 불러 일으켰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버틴다’고 여행에서 스타일에 그리 목맬 필요는 없겠다는 깨달음이다. 멋내기는 포기한 채 이국에서의 감흥과 일행들과의 교감에 더 집중하는 그들의 모습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동시에 현지 옷가게를 들러 당장 필요한 것만을 최소한으로 사 입는 재미도 괜찮은 방식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출발 전부터 작정하고 가는 아웃렛 쇼핑이나 국내 미유통 브랜드라며 무조건 지갑을 열던 구매와는 다른, 현지인의 모습과 꽤나 닮아 있었다. “이 옷을 입으니까 너무 편해”라며 사막에서, 도심에서 트레이닝복으로 버티는 이적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편하게 만들었다. 판초 스타일의 외투를 입고 뛰어다니는 예고편을 보면서는 여행을 가면 저런 전통 옷을 입고 다녀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 패션에 신경 쓰는 이유가 사진을 위해서라면 이만큼 추억을 불러 일으킬 스타일링이 또 어디 있을까.

진정한 멋쟁이의 옷장이 단출한 것처럼 진정한 패션 고수라면 여행 역시 가볍게 떠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같은 티셔츠를 몇 날 몇 일 입더라도 스카프와 모자로 색다른 멋을 내는 세 남자의 스타일링에선 꽤 그럴듯한 실현 가능성도 엿보인다. 그래서 휴가철이 다 끝난 지금, 이 ‘단벌 여행’을 시도해 보고 싶다면 그저 떠날 궁리만 찾는 핑계일일까.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CJ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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