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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일곱 글자에 담긴 삶의 진리를 찾아서 …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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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호 26면

저자: 류시화 출판사: 연금술사 가격: 2만8000원

‘Oncoming cars rush Each a 3-ton bullet And you, flesh and bone(달려오는 차들 각각 3톤짜리 총알 그리고 당신의 살과 뼈)’

『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뉴욕시에서 교통사고 다발 지역에 설치한 교통안전 표지판의 문구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 하이쿠 스타일이다. 세계적으로 이 ‘한 줄 시’를 쓰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현대문학 거장을 비롯해 50여 개 국 시인들이 자국어로 하이쿠를 짓는다. 이미 일본 문학을 넘어 세계인의 문학으로 자리잡은 하이쿠의 매력은 뭘까.

2000년 『한 줄도 너무 길다』는 하이쿠 번역집을 냈던 류시화 시인이 ‘하이쿠의 성인’ 바쇼(芭蕉), 부손(蕪村) 등 에도시대 대표작부터 일본 근대문학의 개척자 나쓰메 소세키를 거쳐 현대시인들의 작품까지 총 1370여 편을 망라한 하이쿠 해설집을 냈다. 시대와 국경을 넘어 21세기에 더욱 사랑받는 하이쿠 미학을 꼼꼼하게 살폈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바쇼)

단 한 줄로 인간의 감동과 탄성을 자아내는 하이쿠는 열일곱 자 속에 인생의 진리와 무한한 세계를 담아내는 궁극의 시다. 그 압축미와 진실성이 다양한 각도에서 칭송받고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위의 시를 쓴 바쇼의 삶 자체에서 하이쿠의 미덕을 발견할 수 있다.

바쇼의 근본 사상은 ‘안주의 거부’였다. 서민 경제가 번성한 에도시대, 충분히 경제적 여유를 누릴 만한 인기 시인이었음에도 그는 스스로 풍요를 내던지고 변방 오지를 전전하며 은둔과 방랑에 투신했다. 들판 위의 고독에서 진리를 찾은 것이다.

그가 추구한 진리는 멀리 있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가깝고 평범한 일상에 있었다. 거창한 작품을 시도하는 제자에게는 “그대는 무언가 특별한 것을 말하려는 약점이 있다. 멀리 있는 것들에서 빛나는 시구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빛나는 시구는 모두 그대 가까이에 있는 사물 속에 있다”고 충고했다.

바쇼의 시 작법은 ‘모습을 앞에 두고 마음은 뒤에 둔다’로 요약된다. 사물의 상태를 적절히 묘사하면 마음은 저절로 따라오니 시인의 감정을 노출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하이쿠에 정해진 해석은 있을 수 없다.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독자에 의해 매번 새롭게 탄생된다. 하이쿠를 읽는다는 것은 주체적으로 상상력을 펼치는 자유로운 행위인 것이다.

신문 지면의 긴 칼럼보다 트위터의 한 줄이 더 큰 파장을 일으키는 시대. 그러고 보면 인간의 마음을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글은 시가 아닐까. 서양에 하이쿠를 소개한 RH 블라이스는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게 된 것은 예수가 본질적으로 시인이기 때문”이라 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무지를 일깨웠지만, 예수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 만물을 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죽이지 마라 파리가 손으로 빌고 발로도 빈다’(잇사)

위 시를 쓴 잇사(一茶)가 바쇼를 제치고 일본은 물론 전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이유도 그가 평생 지극한 가난 속에 살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절망을 유머로 승화시켰던 진정한 휴머니스트였기 때문이다. 바쇼 연구자 김점례는 “일상의 한 순간을 사진 찍듯이 언어로 읊어내 다른 사람들과 그 순간을 공유하며 옆 사람과 대화하게 하는 시가 곧 하이쿠”라고 했다. 지금 시 한 줄의 여유가 절실하다면, 아마 사람이 그리워서일 게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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