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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억4371만 이순신 장군님 어디 계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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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서울에서 택시기사로 30년 넘게 일하고 있는 강전환(62)씨. 아침 운전을 시작하면서 100원 동전을 보통 50개 정도 들고 나온다. 많이 갖고 나오는 날에도 80개를 안 넘는다. “택시요금이 100원 단위로 떨어지니까 동전이 필요하죠. 그래도 퇴근하면서 세어 보면 하루에 10개도 잘 안 줄어듭니다. 손님 10명 중 8명은 카드를 쓰니까. 5년 전부터 카드 손님이 늘더니 점점 많아져요.”

 예전엔 100원 동전 없이는 택시 운전을 할 수 없었다. 100원 동전을 1만원어치 바꿔 와도 사라지는 건 금방이었다. 기사식당이나 정류장이 보이면 택시를 세워 놓고 뛰어가 잔돈을 구해 오기 일쑤였다. 강씨는 “옛날 일”이라고 말한다. “이젠 잔돈을 100원짜리로 거슬러 주면 손님들이 싫어해요. 500원 동전으로 바꿔 달라 그러지. 들고 다니기 무거워서 그런가.”

 천안의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근무하는 김선미(31·여)씨. 요즘 보기 드물다는 현금족이다. 카드 대신 현금을 주로 쓴다. 절약 습관을 들이기 좋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마트 계산대에서 현금으로 지불한 뒤 100원이나 10원 단위로 잔돈이 나오면 꼭 이런 질문이 돌아온다. “잔돈은 포인트카드에 적립해 드릴까요.”

 학교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교실 바닥에 10원이나 50원이 떨어져 있어도 줍는 아이들을 못 봤어요. 10원, 50원을 돈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씀씀이가 다르니 어른보다는 잔돈을 쓰는 편인데도 그래요. 작은 문구류 말고는 1000원 밑으로 가는 게 없고 과자도 그렇잖아요. 학생들 역시 예전만큼 100원을 많이 들고 다니지도 않고.” 김씨는 “어떻게 교육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고 했다.

 지름 24㎜에 무게 5.42g 동그란 은색 몸체. 옆엔 110개의 선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평평한 앞면에 ‘모나리자 미소’ 못지않은 은은한 표정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자리한다. 바로 100원 동전이다. 한데 장군님 얼굴 뵙기가 예전 같지 않다. 이상한 일이다. 한국은행 통계는 정반대 사실을 가리키고 있어서다.

 시중에 풀려 있는 100원 동전 수(발행잔액 기준)가 올해 7월 89억4371만 개를 기록했다. 역대 최고치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9000억원에 육박한다. 한은이 100원짜리 동전을 발행하기 시작한 1970년 11월 이후 이렇게 많은 100원 동전이 시중에 풀린 적이 없었다. 현재 인구 5042만 명(통계청 추정)을 감안해 단순히 계산해도 1인당 1만7700원어치 100원 동전을 갖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1㎏ 가까운 무게의 177개 동전을 늘 갖고 다닐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 많은 100원 동전이 돌지 않고 집 안, 가게, 사무실 아니면 찾지 못할 어디 구석에 숨어 있다는 얘기다.

 올 7월 한은은 100원 동전 4441만 개를 발행했다. 9개월래 최대 규모다. 이에 반해 378만 개만 회수됐다. 발행액 대비 환수액을 의미하는 환수율은 8.5%에 불과했다. 100원 동전 100개를 새로 풀었는데 9개도 안 돌아왔다는 뜻이다. 대대적인 동전 모으기·다시 쓰기 운동을 해도 그때뿐이다. 5만원권이 ‘검은돈으로 악용된다’ ‘음지로 숨었다’며 눈칫밥을 먹고 있지만 100원에 비하면 양반이다. 5만원권 환수율은 20~30% 선을 오간다.

 다른 동전 상황도 비슷하다. 100원만큼이나 환수율은 바닥이다. 10원이 3.7%로 가장 낮았고 다음은 100원(8.5%)·50원(12.1%)·500원(14.0%) 순이었다.

 새로 동전을 찍어 내도 족족 사라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신용카드와 체크카드 사용이 늘며 잔돈 수요가 줄었다. 물가 상승에 100원의 상대적 가치가 낮아져 쓰임새가 적어진 까닭도 있다.

 한은은 회수되는 화폐 액수(환수액)에 맞춰 신규 발행 규모를 결정한다. 화폐 유통량을 적절하게 유지해야 하는 책임 때문이다. 나상욱 한은 발권국장은 “잔돈이 필요한 수요가 있기 때문에 신규 발행 규모를 맘대로 줄일 수 없다. 낮은 환수율로 100원을 비롯한 동전 발행잔액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찍는 족족 사라지는 동전 물량을 대느라 한은과 한국조폐공사 속만 탈 뿐이다. 한은은 동전을 새로 만드는 데 해마다 600억원 정도를 쓴다. 말 그대로 ‘썩어서 버리는 돈’도 부지기수다. 부식됐거나 찌그러져 제 역할을 못 한다는 이유로 지난해 폐기된 10~500원 동전 수는 1543만2000개, 금액으로는 14억5200만원에 달했다.

 동전 중에서도 10원 신세가 가장 처량하다. 5원이나 1원은 발행량이나 유통량 자체가 적어 10원만큼 열악한 상황은 아니다. 10원은 환수율도 동전 가운데 가장 낮을 뿐 아니라 훼손 범죄의 표적이 되곤 한다.

 2010년 10월 노모씨는 10원 동전 5억원어치를 녹여 구리 덩어리로 만들어 팔다가 서울 광진경찰서에 잡혔다. 전에 없던 범죄였다. 과거엔 10원을 눌러 목걸이 같은 장신구를 제조해 판매하던 정도였다. 타깃은 70년 7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발행됐던 옛 10원 동전이다. 구리 65%에 아연 35%로 만들어져 있는데 구리 값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생겨난 신종 범죄였다. 10원 동전을 녹여 팔면 액면 가치보다 더 높은 가격을 쳐 준다는 점을 노렸다.

 한은은 달라진 세태에 맞춰 2011년 법을 고쳤다. 주화를 훼손하면 ‘6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새로운 내용을 한은법에 담았다. 지난달 김모씨가 주물공장에서 40만 개의 옛 10원 동전을 녹이려다 경찰에 잡혔다. 김씨 역시 한은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정상덕 한은 울산본부 부본부장은 “그나마 국내는 화폐 위조 또는 훼손에 대한 처벌규정이 강하고 시민의 관련 범죄 신고의식도 높은 편이라 다른 나라에 비해 훼손 사례가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

 액면가를 넘는 제조비용 탓에 한은은 10원 디자인도 바꿨다. 2006년 12월 이후 발행되고 있는 지금의 10원 동전은 구리 48%, 아연 52%로 크기도 작고 무게도 가볍다. 정상덕 부본부장은 “그래도 올 7월 기준 소재 원가는 22원으로 액면가 10원을 뛰어넘는다. 물론 제조·유통·관리비용은 뺀 수치”라고 전했다. 한은의 고민은 깊어져 갈 수밖에 없다.

 ‘잔돈의 큰 문제(The big problem of small change)’. 미국 뉴욕대 교수 토머스 사전트의 논문 제목이다. 201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사전트는 작은 돈의 역사에 천착했다. 그의 분석대로라면 화폐경제의 위기는 늘 잔돈의 위기에서 시작됐다. 불편과 고통을 겪은 건 작은 단위의 돈을 주로 쓰는 서민이었다.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함량 나쁜 저질 동전을 막 찍어 냈던 죽은 아버지 헨리 8세와의 정치적 결별을 선언하고 민심을 다시 회복하려 할 때 토머스 그레셤 재정고문의 입에서 나온 조언이 그 유명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였다. 차현진 한은 커뮤니케이션국장은 “100원과 10원의 위기를 단순하게 보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면서 “좀 더 면밀히 연구하고 대응책을 찾아나가려 한다”고 했다.

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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