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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미드 '위기의 주부들' 훔쳐 보고 아내 외도 걱정하는 북한 남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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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김일성 그림에 꽃을 바치는 북한 학생들. 북한에서 정치는 그 어느 나라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사진 책과함께]

영국 외교관, 평양에서 보낸 900일
존 에버라드 지음
이재만 옮김, 책과함께
362쪽, 1만8000원

낙후된 국가에 떨어진 외교관의 태도는 두 가지로 갈린다. 임기가 끝날 날을 꼽으며 그럭저럭 버티거나, 아니면 다시 못해볼 색다른 경험에 나서는 경우다. 이 책은 후자를 택한 영국 외교관의 평양 이야기다. 저자는 2006년 2월부터 2년 5개월간 평양 주재 영국대사였다. 현재는 독립 다큐제작자로 활동 중이다. 그는 “어느 추운 날 평양공항에 낡아빠진 북한 비행기로 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부임 첫날을 회고한다.

그가 북한의 속살을 들여다보려고 자전거 여행을 선택했다. 샛노란 사이클 복장에 기어가 여럿 달린 자전거를 탔다. 툭하면 평양과 주변 도시를 쏘다니는 이 괴짜 외교관은 북한 당국의 골칫거리였다. 에버라드는 ‘남포 여행 때 노점상에서 남새빵(채소빵)을 사먹는 실수를 저질렀다. 평양에 보고돼 외무성과 보안당국이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고 돌아보고 있다. 북한 주재 외교관에게 일반 주민을 접촉하는 건 금기라는 얘기다.

존 에버라드

에버라드의 평양 관찰기는 예사롭지 않다. 서방 외교관의 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북한 주민의 삶의 현장에 닿아있다.

저자는 평양 주민을 세 부류로 분류해냈다. 평양 정중앙 특별거주 구역과 외곽 빌라족이 맨 위 계층이다. 평양 중심부 고급아파트 거주자가 그 다음이다.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이 부류로 예시됐다. 평범하고 허름한 아파트 거주자는 맨 아래 계층이라고 한다.

북한 무궤도전차 차체에 줄지어 그려진 빨간색 별 하나가 각각 1만회 운행을 의미한다는 것도 새롭다. 족히 30개가 넘는 별이 그려진 전차들은 사실 옛 동독 도시에서 폐차 처리된 것임을 지적한다. 대사관저에 머물거나 파티만 즐겼다면 알 수 없는 정보다.

매매춘과 외도 문제까지 담아낸 그의 취재력도 놀랍다. 에버라드는 “어떤 북한 남자는 평양을 벗어날 때마다 매춘부를 찾아간다고 했다. 미화 10달러가 든단다”라고 전한다. 북한 남성이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Desperate Housewives)을 본 뒤 자기 아내가 외도를 할까 걱정하더라는 일화도 소개했다.

서울에서 발행된 잡지 코스모폴리탄을 읽던 평양의 젊은 여성들은 에버라드가 다가서자 황급히 자리를 떴다. 거기엔 파트너와 섹스를 즐기는 방법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남한 DVD 시청을 단속하려 보안요원들이 일부러 정전을 시킨 뒤 플레이어 안의 증거물을 빼내지 못하게 하는 수법을 쓴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는 평양의 외국 신자 말을 인용해 “북한 가톨릭교회의 절반은 보안당국의 끄나풀”이라고 꼬집고 있다. 한번은 에버라드의 카메라를 검열한 북한 군인이 “좋은 것만 부탁합니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책 원제목이 “Only Beautiful, Please...”로 시작되는 것도 그 때의 인상 때문이라고 한다.

백미는 책 후반부 세계가 북한을 어떻게 상대해왔고, 왜 실패했는지 분석한 대목이다. 저자는 북한 정권이 더 나은 미래를 엘리트층에게 호소할 가망이 없다며 어둡게 전망한다. 그러면서 “붕괴는 장기적 전망인 반면 북핵 위협은 당면한 문제”라며 ‘붕괴 전 핵 위기’를 강조한다. 우리 모두 북한을 상대로 러시안 룰렛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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