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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세 모녀 자살 방지법' 더 늦출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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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능후
경기대 행정·사회복지대학원장

주민자치센터와 사회복지관은 국회와 중앙정부가 만든 추상적인 법과 제도를 구체적 모습으로 실현하는 사회복지의 최일선이다. 매일 수많은 민원인이 찾아와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해결책을 찾는 곳이어서 늘 분주하다.

 정신없이 바쁜 현장의 사회복지사들에게 업무를 가중시키는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개별급여 관련 논란이 그것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운영은 일선 복지 업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자그마한 제도 내용 변경도 일선에는 큰 파장을 일으킨다. 이번에는 작은 변경이 아니라 제도의 핵심 내용인 급여체계가 기존의 통합급여에서 개별급여로 바뀌고, 그에 따라 대상자가 늘고, 급여 산정 방식도 변경될 것이라는 대규모 내용 변경 예고가 정치권에서 나온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그러나 논의만 무성한 채 정작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일선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사각지대에 있는 가구는 자신이 새로운 수급가구가 되는지, 기존 수급가구의 경우 지위 변경이나 수급액 변경이 없는지 일선창구에 문의가 쏟아지는데 담당자는 현재까지 확정된 내용이 없어 제대로 된 답변을 할 수 없다. 개별급여체계 도입으로 수급권 획득을 기다리던 저소득 가구도, 제도 운영의 효율성이 높아지기를 기대했던 일선 담당자도 이제 지쳐가고 있는 것이다.

 개정이 추진되고 있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한국의 빈곤 정책사에서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입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국민에 대하여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극심한 경제적 불안기에 빈곤가구를 돌보는 유용한 수단이었고, 현재까지 우리나라 빈곤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빈곤 여부를 가늠하는 최저생계비 개념이 이 법에 기초하고 있고, 사회적 지원의 최우선 순위에 놓이는 ‘기초보장 수급가구’가 이 법의 수급가구를 뜻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빈곤층을 돌보는 가장 유력한 사회안전망이다.

 올해로 시행 14년을 맞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그 위업에도 불구하고 보완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왔다. 주요 미비점은 광범위한 수급 사각지대의 존재, 그리고 수급자의 복지의존성 심화 문제다. 다만 사각지대와 복지의존성 문제는 우리의 기초생활보장제도만의 문제는 아니고 세계 각국의 공공부조제도가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로서 완전한 해결은 힘들지만 정도를 완화시킬 수 있는 제도 개선이 끊임없이 추진되어야 할 사안이다.

 정부가 지난해 4월 구성한 ‘맞춤형 복지급여기획단’에서 기초생활보장제도 개편안을 제시한 이후 학계, 시민단체, 정치권 차원에서 활발한 논의와 의견 제시가 이뤄졌다. 지금까지 논의를 거치며 대체적으로 합의된 개편 내용은 첫째, 복지의존성을 해소하고 수급자의 자활을 촉진할 수 있도록 기존의 통합급여체계를 급여 종류별로 선정 기준과 급여 수준을 달리하는 개별급여체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대상자 선정 기준이 최저생계비라는 절대빈곤 개념에서 중위소득의 일정 비율을 사용하는 상대빈곤 개념으로 전환하게 되며, 급여 영역별로 복지 수요의 긴급도에 따라 대상자 범위가 달라지는 맞춤급여가 시행될 수 있다.

 둘째,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부양의무자 요건을 완화하는 것이다. 부양의무자 요건은 부양의무자의 범위와 부양능력 판정 기준으로 구성된다. 입법 이후 지금까지 부양의무자 범위는 수차례 축소되었고, 부양능력 판정 기준인 소득과 재산 수준은 상향 조정되어 왔지만 개선이 필요하다. 친족 부양의 전통이 약해져 가고 있는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부양의무자 요건 완화는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다만 일시에 부양의무자 규정을 철폐하자는 무리한 요구보다 재정부담 능력을 감안하면서 단계적으로 완화시켜 가는 실용적인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개편안이 시행되면 기초보장 수급자가 늘어나고, 여기에 들어가는 예산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급자 수는 현행 139만 명에서 176만 명으로 늘어나 사각지대가 그만큼 줄어들 전망이다. 가구당 현금 수급액은 개편 전 42만4000원에서 48만6000원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산되는데, 수급가구와 평균 수급액이 늘면서 예산도 연간으로 계산하면 내년 기준 1조3000억원이 증가하게 된다.

 송파 세 모녀 자살사건으로 전 사회가 충격에 빠졌던 것이 불과 6개월 전이다.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외치던 정치권의 언행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복지 현장은 오늘도 개정되지 않은 법의 혜택을 기다리느라 기린 목이 되고 있다.

언제쯤이면 개정된 법을 준거로 일선에서 행정적 시행준비를 시작할 수 있으며, 개선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해 사각지대 가구들이 안전망 혜택을 누리게 될까. 오랜 예고 과정에서 사회적 이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국회는 법 개정만을 기다리고 있는 국민의 가슴이 타들어 가고 있음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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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능후 경기대 행정·사회복지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