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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서 사랑으로 … 드라큘라의 재탄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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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호 24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400년을 버텨 온 드라큘라 백작. 그토록 긴 시간 동안 그는 무엇을 기다려 온 걸까? 영원한 삶을 위해 남의 피를 빨아먹는 잔인한 존재로 오랜 세월 ‘공포의 아이콘’으로 각인된 이 400살 노인이 올 여름 명예회복을 선언했다. 간담 서늘하게 하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감추고 감미로운 사랑 노래를 불러 여심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겠단다.

뮤지컬 ‘드라큘라’ 7월 17일~9월 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19세기 말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가 쓴 원조 공포소설 ‘드라큘라’가 뮤지컬 무대에 올랐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뮤지컬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 작곡으로, 2001년 초연 후 2004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스위스·오스트리아·영국·일본 등 세계를 순항중인 작품이다. 2014년 한국 버전은 원작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논레플리카(Non-Replica) 프로덕션. 와일드혼을 비롯해 ‘한국인의 감성을 가장 잘 아는 연출가’ 데이비드 스완과 프로듀서 신춘수 등 꼭 10년 전 베스트셀러 뮤지컬로 등극한 ‘지킬 앤 하이드(이하 ‘지킬’)’ 팀이 다시 뭉쳤다.

‘지킬’이 유독 한국에서만 대박이 난 것처럼 ‘드라큘라’ 역시 브로드웨이에서는 크게 흥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해외 성공작을 그대로 수입해 재미보는 일은 이제 드물다. 원작은 재료일 뿐, 토착화가 관건인 셈이다. ‘포스트 지킬’을 꿈꾸며 우리 입맛에 맞게 재구성한 이번 무대는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으로 대중밀착형 전략을 택했다. 예술적 성과를 논하긴 어렵지만 20~30대 여성팬이 회전문을 도는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롱런할 요소로 두루 무장하고 있다.

첫째, 스릴러를 가장한 판타지 러브스토리다. 사실 2001년 한국 뮤지컬 역사를 다시 쓴 ‘오페라의 유령’ 이후 ‘지킬’ ‘잭더리퍼’ ‘엘리자벳’ ‘레베카’ 등 대히트작들은 어느 정도 스릴러의 요소를 갖췄다. 강렬한 스펙터클로 무대만이 줄 수 있는 날것 그대로의 전율을 전달하기에 스릴러만한 장르가 없기 때문. ‘드라큘라’는 스릴러인 척 판타지 러브스토리에 방점을 찍었다. 안개 자욱이 베일에 싸인 고성의 비밀이 400년을 기다려온 어마어마한 사랑이었다니, 일상을 잊고파 극장을 찾는 뮤지컬 팬들에게 ‘++’급 현실도피처를 제공하는 셈이다.

둘째, 강력한 스타 캐스팅으로 초반 기선을 제압했다. 출연작마다 전석매진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최고의 스타 김준수를 기용한 것. ‘만인의 연인’ 김준수는 드라큘라가 ‘공포의 아이콘’에서 ‘사랑의 아이콘’으로 거듭나는데 한몫했다. 그간 가창력과 퍼포먼스, 카리스마에서 고른 점수를 받아온 그가 유일한 물음표로 남았던 연기력을 검증받은 덕이다. 마늘·십자가·성경책 3종 세트를 물리치는 초월적 액션과 함께 질투에 몸을 떨며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적인 연기다.

셋째, 와일드혼 특유의 폭발하는 음악이다. 한국 공연을 위해 3곡의 신곡까지 추가해 시종일관 강한 비트로 긴장감을 유지했다. ‘Loving You Keeps Me Alive’ ‘If I Had Wings’등 서정적인 멜로디로 시작해 화끈한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며 가슴 후련한 상승감을 주는 주요 넘버들은 ‘지킬’의 ‘지금 이 순간’만큼이나 중독성과 호소력을 갖췄다.

넷째, 이제껏 본적 없는 웅장한 무대다. 클래식 느낌 물씬한 오페라극장에 맞춤한 듯 어울리는 고딕성채는 그 자체로 공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여기에 국내최초 4중 턴테이블을 이용한 현란한 장면전환 기술로 순식간에 빈틈없이 구성되는 다양한 공간들은 간만에 스케일 있는 대작을 만난 실감을 완성해주고 있었다.

대형 기획사가 스타 마케팅을 내세운 초연작에 대한 관점이 제각각인 탓인지, 평가는 엇갈리는 편이다. 스토리 전개가 엉성하고 드라큘라와 미나의 사랑에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드라큘라의 러브스토리를 우린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뮤지컬 무대는 뻔히 아는 이야기를 시청각적으로 증폭시켜 감동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 400년 묵은 드라큘라의 사랑에 구차한 사설은 필요 없다. 가슴 뛰는 음악만으로 공감을 불러야 정석이다. ‘나를 살게 한 힘이 오직 너에 대한 사랑’이라며 뭉클한 멜로디로 호소하는 절절한 발라드를 외면할 여심이 있을까? 갈대 같은 미나의 마음에 객석도 덩달아 요동친다.

한 해 백여 편의 신작 뮤지컬이 쏟아지는 시대. 전세계에서 들어오는 온갖 검증미필 뮤지컬의 홍수에 무엇을 봐야할지 어지럽다. 대부분 재연을 점칠 수 없는 씁쓸한 완성도에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마치 IMF 직전 주식시장처럼 실체 없는 거품이 잔뜩 낀 느낌이다. 대형 기획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예정작이 줄줄이 취소되는 사태가 불길한 예감을 부추기는 요즘, 오랜만에 만난 묵직한 신작이 그나마 한국 뮤지컬의 굳건한 펀더멘탈을 확인해 주는 듯해 다행스럽다. ‘드라큘라’의 집요한 사랑에 박수치는 또 다른 이유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오디뮤지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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