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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나쁜 남자, 아픈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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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형경
소설가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은 비행기 사고로 태평양의 무인도에 불시착한 소년들 이야기로 시작된다. 연장자인 랠프는 다섯 살부터 열두 살 사이 평범한 소년들로 구성된 이 집단을 이끌며 산꼭대기에 봉화를 피우고 바닷가에 오두막을 짓는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모두를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한다.

하지만 경쟁자 잭은 자신을 따르는 소년들을 데리고 나가 멧돼지 사냥을 하고 고기를 구우며 축제를 벌인다. 잭의 무리는 한 소년을 짐승으로 오인하여 죽이고, 불 피우는 도구인 안경을 뺏기 위해 또 다른 소년을 죽인다. 마지막에 그들은 랠프를 사냥하기 위해 섬 전체를 무대로 필사의 추격전을 벌인다. 작가는 한 무리 소년들을 무인도에 데려다 놓고 묻는다. 인간과 야만은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마음 아픈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는 이즈음에는 절로 저 질문이 떠오른다. 진화의 궤적에서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두 가지 기능이 성욕과 공격성이라 한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 살아 있는 현대인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섹시하고 폭력적인 종족일 거라 생각해봐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우리 현대사의 식민지, 전쟁, 가난 등 불행한 경험이 사회 구성원에게 떠안긴 격분, 박해감, 결핍감 등이 제대로 인식되고 보살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봐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경험 주체들이 해결하지 못한 심리적 문제들이 다음 세대에게 대물림되면서 점차 강화되는 현상이 두드러져 보일 뿐이다. 여자와 아이들을 상대로 행하는 남자들의 폭력이 범죄라는 사실을 홍보하는 동안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듯도 하다. 남자가 남자에게 행하는 폭력도 경쟁이나 위계 정립이 아니라 단지 범죄일 뿐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말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가장 나쁜 사람이 가장 아픈 사람이라고. 폭력적이고 괴팍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가 성장기에 중요한 양육자로부터 그와 같은 것을 받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성장기 소년에게 단 한 명의 어른이라도 따뜻한 눈길을 주고,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잠재력을 믿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픈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마음의 문제를 인식하고 보살피기 시작한 지 십 년이 조금 넘었다. 이즈음에는 남자들도 내면에 마음이라는 것이 있으며 그것이 가장 힘이 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듯하다. 아픈 남자가 나쁜 남자가 되지 않도록 개인의 인식과 사회 시스템이 함께 변화해야 할 것이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