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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시조] 바람이 연잎 접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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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바람이 연잎 접듯    유재영

어린 구름 배밀이 훔쳐보다 문득 들킨

고개 쳐든 자벌레 이끼 삭은 작은 돌담

벽오동 푸른 그림자 말똥처럼 누워 있다

고요가 턱을 괴는 동남향 툇마루에

먹 냄새 뒤끝 맑은 수월재 한나절은

바람이 연잎을 접듯 내 생각도 반그늘

차 한 잔 따라 놓고 누군가 기다리다

꽃씨가 날아가는 방향을 바라본다

어쩌면 우리 먼 그때, 약속 같은 햇빛이며

고요의 다른 이름은 ‘그늘’. 시들은 그 그늘 속에서 서식한다. ‘어린 구름’이 배밀이를 하거나 그 배밀이를 훔쳐보려고 ‘자벌레’가 고개를 쳐들거나 하는 찰나를 시인은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기민한 촉수에 걸려드는 순간의 미학은 아름답다. ‘바람이 연잎을 접듯’ ‘생각도 반그늘’로 접히는 한나절이면, 우주 또한 반쯤은 접히는 걸까. 고즈넉하게 번지는 아우라는 깨끗하다. 청정한 시적 경지가 묻어나는 고요 속에서 정중동의 미학적 진경을 유유히 개진하는 독보적 감각은 추종을 불허한다.

문법이나 논리는 끼어들 여지가 없고 통찰과 직관은 가늠할 필요가 없다. 사물의 미시적인 움직임을 통해 거시적 세계관을 끌어가는 사유 속에서 작품의 율과 격은 더할 나위 없이 정갈하고 단아한 우아미를 그려낸다. 정제된 완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시에서 마지막 구는 파격이다. 예외적인 연결 어미 하나로 문자의 안팎을 무너뜨리며, 시의 세계가 문자 안에 갇히는 게 아니라 문자 밖에서 더욱 자유로워진다는 걸 알린다. 고요는 초속 0.2m로 부는 바람의 이름이다. 그 ‘고요가 턱을 괴는’ 수월재 동남향 툇마루. 시인의 명편들이 태어나는 산실은 ‘꽃씨가 날아가는’ 햇빛 쪽으로 그늘도 열려 있다. 작은 생명들이 고단한 땀을 들이는 혈통 좋은 그 그늘이 오늘도 실핏줄 실팍하니 굵어가는 중이리라. 박명숙(시조시인)

◆유재영=1948년 천안 출생. 1973년 박목월 시인에게 시를, 이태극 시인에게 시조를 추천 받아 등단. 시집『한 방울의 피』『지상의 중심이 되어』, 시조집『햇빛 시간』『절반의 고요』. 오늘의시조문학상·중앙일보시조대상·이호우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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