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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언론부터 정신 차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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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이미 우리 사회는 외부의 적(敵)들이 보면 어깨춤이 절로 날 만큼 충분히 어지럽다. 예까지 오는 데엔 적폐의 근원 관료 사회, 꼼수와 선동을 일삼는 정치권, 책임을 회피하고 인사를 망사(亡事)로 만든 청와대에다 최근엔 검경까지 동시다발로 ‘뻘짓’을 하며 무능함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등 나라 지도력 전체가 동원됐다. 이 엄청난 스케일에 힘입어 가히 전대미문의 ‘블록버스터’급 난맥상이 창출됐다. 여기에 대중은 음모론과 괴담을 보태 난맥상을 확대재생산한다. 이 정도론 ‘한국형 블록버스터’라 할 수 없다. 결정적 한 수가 있다. ‘대한민국 언론’.

 멀리 갈 것도 없이 요즘 일부 종편의 뉴스 프로그램만 살짝 보자. 뉴스는 유대균과 박수경이 덮었다. 진행자와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변호사·교수라는 전문가 패널이 담론을 한다. 진행자가 묻는다. “유대균과 박수경은 무슨 관계일까요?” 패널들이 답한다. “호위무사라기보다 감시자” “남녀가 석 달 동안 좁은 공간에서…” “내연 관계라면 죄와 벌은…”. 그들은 전문성이 아닌 추측, 팩트가 아닌 상상에 근거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수다’를 요즘 애들 말로 ‘입으로 털기’에 바쁘다. 명예훼손과 성희롱의 경계를 넘나든 건 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선정성만 좇는 ‘황색언론’도 있다. 한데 황색언론을 하려면 정체성을 밝혀야 한다. 정론 뉴스인 양 탈을 쓰고 황색언론을 지향하는 건 반칙이다.

 이 밖에도 실망스러운 점은 많았다. 한 예로 대부분의 언론은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파괴했다. 일반 피의자 얼굴은 공개해선 안 된다. 한데 박수경은 수갑 찬 손까지 그대로 노출시켰다. 언론이 여기서 지적했어야 하는 건 피의자 인권을 보호하지 않고 포토라인 앞에 내던진 수사당국의 무책임이었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다. 또 언론인이 영혼에까지 새겨두는 명제는 ‘팩트는 신성하다’는 것이다. 언론은 팩트를 보도하고, 가정과 추론도 팩트에 근거해야 한다. 정확한 팩트를 발굴함으로써 사회가 괴담과 음모론에 빠지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도 언론의 책임 중 하나다.

 이런 점에서 요즘 유대균 관련 보도만 한번 따져보자. 유병언과 유대균이 중요한 건 그들의 사생활이 아니라 ‘세월호 사건’의 주요 피의자이기 때문이다. 한데 요즘 보도의 양상을 보면 세월호는 어디 가고 유병언과 유대균, 박수경, 구원파 등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가 지나치게 넘친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병언을 잡으라고 다그친 후, 세월호 책임이 모두 유병언에게 있는 듯 몰아간 측면도 있다. 물론 1차 책임은 유병언에게 있다. 배를 불법 증축하고 과적을 조장한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이런 불법이 우리 바다를 누비도록 환경을 조성한 당국과 어린 생명들이 수몰되는 순간에도 멀뚱멀뚱 구경만 했던 해경의 책임이 그보다 더 가볍지 않다.

 유병언은 죽었다. 이런 정국에 언론의 할 일은 죽은 유병언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미모의 태권도 심판에 대한 말초적 관심을 부추겨 정부가 적폐와 책임을 슬쩍 비껴가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젠 누구라도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관료가 적폐에서, 정치권이 기만에서, 박 대통령이 수첩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리느니 언론이 말(言)을 바로 세우는 게 더 빠를 거다. 그래야 혼란 조장자들에게 ‘똑바로 하라’고 해도 먹힌다. 이 블록버스터급 혼란에서 ‘언론정립’이 수습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 모든 언론이 갈피를 잃은 건 아니다. 그러나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 그런 미꾸라지에 대한 감시와 견제도 언론의 몫으로 보인다. 지구의 회전축이 바뀌어도 언론인의 역할은 워치독(watch dog·감시견)이다. 썩은 고기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나 주인에게 사냥감을 물어다주는 ‘사냥견’을 동료로 생각하는 순간, 워치독은 타락한다. 정신 차리자.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