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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누군가와의 애틋한 추억을 쌓아가는 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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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호 28면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1882~1941) 아일랜드 태생의 시인이자 소설가. 더블린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문학과 언어학을 전공했다. 대표작으로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혁신적인 소설 기법과 실험적인 언어 구사로 유명한 『율리시즈』와『피네건의 경야』가 있다.

신문에 실린 인사동정 난에서 동창생의 이름을 발견하곤 혹시 내가 뒤처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에 사로잡힌 적 있었을 것이다. 나보다 능력이 한참 떨어지는 친구였는데, 그러면서 부질없이 자신의 불운을 탓해보기도 했을 것이다.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에 나오는 챈들러처럼 말이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64>『더블린 사람들』과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은 제임스 조이스의 첫 번째 소설로 20세기 초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 열다섯 편의 이야기를 묶은 것인데, 챈들러는 ‘작은 구름’편의 주인공이다. 서른두 살의 시인 지망생 챈들러는 8년 만에 옛 친구 갤러허를 만난다. 런던에서 기자로 성공한 갤러허는 겉만 번지르르한 속물이지만 챈들러는 그래도 친구가 부럽다.

“자신의 삶과 친구의 삶이 완전히 딴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갤러허의 가문이나 학력은 자기보다 못했다. 도대체 나의 길을 막고 있는 건 뭐란 말인가?”

그는 아내가 부탁한 커피를 사오는 것도 잊은 채 집으로 돌아온다. 할부로 구입한 가구 대금도 다 갚지 못한 처지, 갤러허처럼 대담하게 살아보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 그래도 시집을 한 권 출판하면 길이 트일 것도 같다. 그는 바이런의 시를 읽으며 몇 시간 전 느꼈던 시상을 떠올린다. 그 순간 잠에서 깬 갓난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도저히 시를 읽을 수가 없다. 그는 버럭 고함을 지른다. 아기는 자지러지면서 비명을 지르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다. 아내가 아기를 겨우 진정시키자 그는 뉘우침의 눈물을 흘린다.

뭔가 느껴지지 않는가? 『더블린 사람들』은 수록 순서에 따라 주인공들의 유년기와 청년기, 성년기를 보여주는 일종의 연작소설 구성인데, 여느 단편소설들처럼 극적인 반전이 있다거나 잔잔한 재미를 주는 건 아니지만 한 편 한 편마다 가슴 뭉클한 깨우침 같은 것을 선사한다.

조이스는 영국의 식민 지배 아래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더블린 사람들의 마비된 삶을 그렸다고 했지만, 굳이 식민지 상황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적나라한 일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더블린 사람들』은 그래서 꼭 100년 전인 1914년에 발표된, 멀리 아일랜드를 무대로 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낯설지 않다.

짝사랑하는 이웃집 누나에게 줄 선물을 사러 동전 몇 푼 들고 바자회에 달려가는 소년, 가난에 찌든 삶을 벗어나려 하면서도 가족이라는 굴레 때문에 모처럼 찾아온 탈출의 기회를 끝내 붙잡지 못하는 처녀, 경제력이 있는 남자를 유혹해 결혼으로 옭아매려는 하숙집 모녀, 직장과 술집에서 참담한 수모를 겪고는 집으로 돌아와 어린 아들에게 화풀이하는 형편없는 가장.

열다섯 편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길고 여운도 제일 오래 남는 마지막 중편 ‘죽은 자’를 보자. 크리스마스 만찬에 참석한 뒤 호텔로 돌아온 가브리엘은 아내에게 육체적 욕구를 느끼지만 머뭇거리며 망설인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그를 껴안으며 키스를 한다. 그는 행복감에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하지만 아내는 만찬에서 들었던 노래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아주 옛날에 그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생각나서요.”

가브리엘은 아내의 옛 연인에 질투를 느끼며 분노한다. 그런데 그는 열일곱 나이에 죽었단다. 그것도 아내 때문에 죽은 것 같다고 한다. 워낙 병약했던 그는 아내가 수도원으로 떠나기 전날 밤 비를 맞으며 찾아왔다가 일주일만에 죽었다는 것이다. 가브리엘은 아내의 인생에서 남편인 자신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였는지 되돌아본다.

그러고는 자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막 피어나던 처녀 시절 아내의 아리따운 모습은 어땠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자 아내가 가엾어지면서 따뜻한 동정심이 우러난다. “그래, 아내의 삶에도 그런 로맨스가 있었구나. 한 남자가 아내 때문에 죽었어.”

그 연인은 떠나는 아내에게 자기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는 그의 마지막 눈길을 오랜 세월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누군가와의 애틋한 추억들을 쌓아가는 것임을 가브리엘은 깨닫는다. “사람은 모두 하나씩 하나씩 그림자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늙어서 기력이 쇠해 쓸쓸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한창 불타오르는 넘치는 정열을 안고 대담하게 저 세상으로 가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리라.”

창문 밖에는 눈이 내린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과 죽은 사람들 위로 소리없이 눈이 쌓여간다. 『더블린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모두 이렇게 상징적인 장면과 함께 끝난다. 그래서 한 편을 다 읽고 나면 빛 바랜 흑백사진처럼 아련한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가는 동창생들도 어느새 그저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처럼 스스로를 위안하게 되는 것이다.

“친구들이 나보다 훌륭해 보이는 날은/ 꽃 사 들고 돌아와/ 아내와 즐겼노라.”(「나를 사랑하는 노래」 가운데)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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