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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간 매일 날짜 그림, 얼굴 사진 … 하루하루가 예술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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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로만 오팔카 는 늙어 가는 자기 얼굴을 40년 가까이 찍었다. 뒤의 회색 배경은 그의 ‘1965/1∼∞’ 시리즈. [사진 학고재]

#1. 1965년 폴란드 미술가 로만 오팔카(1931∼2011)는 검은 캔버스에 흰 물감으로 숫자를 빼곡히 적어 나갔다. 70년대 초반부턴 캔버스를 새로 바꿀 때마다 바탕색에 1%씩 흰 물감을 섞었다. 72년부터는 자신의 모습을 매일 사진으로 남겼다. 작업실에 스스로 셔터를 눌러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놓고 매일 그 자리에 흰 셔츠를 입고 섰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사진도, 그림도 점점 하얗게 됐다. 언젠가는 흰 바탕에 흰 물감으로 보이지 않는 그림을 그리리라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2011년 여든 살 생일을 3주 앞두고 세상을 떴다. 그리하여 46년간 이어오던 그의 ‘1965/1∼∞’ 시리즈도 완성됐다.

 #2. 일본 출신 미술가 온 가와라는 66년 1월 4일 뉴욕의 작업실에서 20㎝ 내외의 캔버스에 ‘JAN.4.1966’이라고 그렸다. 직접 만든 상자엔 그날의 신문을 스크랩했다. 이후 50년 가까이 이어진 ‘오늘(Today)’ 시리즈의 시작이었다. 단색조의 배경 위에 산세리프체로 그날의 날짜를 기록한 이 작품은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완성될 연작으로 기획됐다. 지난 11일 소속 화랑인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는 그의 죽음을 알렸다. <중앙일보 7월 14일자 27면> ‘날짜 그림’의 완결이었다.

2004년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서 열린 온 가와라의 ‘100만년’ 퍼포먼스. 오른쪽은 그의 ‘오늘’ 시리즈. [사진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일기를 쓰듯 매일매일 ‘똑같은’ 그림을 그린 그들은 무엇을 꿈꿨을까. 2008년 서울에서 전시를 연 로만 오팔카는 “내가 뭘 하든 늘 시간은 간다. 그 시간이라는 나쁜 놈을 한 묶음으로 잡아두고 싶어서 나는 숫자를 적고 사진을 찍는다”라고 말했다. 규칙적 반복을 요구하는 이 일이 쉽지만은 않았던 듯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도 이 사진을 찍었다. 내가 사진에 보여주고 싶은 건 나 자신도, 내 인생도 아니다. 유한한 인생을 사는 우리 얘기, 휴머니즘, 시간, 그리고 우주”라고도 했다.

그에게 늙는다는 건 “점점 하얗게 변하는 것”이었으며, 그의 작품은 그가 “점점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시간을 잡으려는 이 무모한 시도는 그가 유한한 삶을 마치면서 불멸의 예술이 됐다. 나는 지금도 문득, 가령 정기적으로 새치를 염색해야 할 때 그가 떠오른다.

  온 가와라는 은둔의 작가였다. 65년 일본 미술지 ‘미술수첩’과의 인터뷰가 마지막 언론 접촉이었다. 이 때문에 언론은 부고 작성에 애를 먹었다. 뉴욕타임스조차 뉴욕에서 50년간 활동한 이 미술가의 부고를 16일자에야 다뤘다. 제목은 ‘온 가와라, 매일의 품위를 발견한 개념 미술가, 81세로 사망’이었다. 사망 일시, 사인(死因) 등 부고의 기본인 육하원칙은 물론 고인의 얼굴 사진조차 없었다. 온 가와라 스스로가 알리는 자신의 이력은 오직 나이, 이 또한 살아온 날짜로 표기했다. 소속 갤러리가 지난주 계산한 바로는 그는 생후 2만9771일에 도달했다.

 온 가와라의 또 다른 작품으로 ‘100만 년’(1969)이 있다. 이전 100만 년(998031BC)과 1993년 이후 100만 년(1001992AD)의 숫자를 타이핑한 책들이다. 과거 편은 ‘그동안 살다가 죽은 사람들 모두를 위하여’, 미래 편은 ‘마지막 생존자를 위하여’라는 헌사로 시작된다. 암스테르담 슈테델릭 미술관에서,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서 두 사람이 투명 박스 속에 들어가 책을 낭독했다. 24시간 쉬지 않고 읽으면 책 한 권에 한 달씩 걸린다고 했다. 이 장구한 세월 동안 내가 이 우주에 머문 것은 한순간, 작품이 전하는 느낌은 그랬다.

 ‘스모크’(1995)라는 영화가 있다. 폴 오스터(각본)와 웨인왕(감독)이 만들었다. 브루클린의 담배 가게 주인 오기(하비 카이텔)는 10년 넘도록 매일 아침 같은 시간 가게 앞 사진을 찍어 소중히 스크랩했다. “다 똑같잖아”라며 시큰둥해하는 친구에게 그는 “아니야. 모두 다른 사진이야. 천천히 봐야 해”라고 응수한다. 설명인즉 날씨가, 지나간 사람이, 입은 옷이 말해주는 계절이 조금씩 다르다. 평범한 일상이 경이로운 기록이 되고, 담배 가게 아저씨가 예술가가 되는 가슴 뭉클한 장면이다. 반세기 가까이 ‘오늘’을 담았던 예술가들의 진득한 시도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우리의 하루하루는 빛난다.

[S BOX] 특별한 하루, 43억원

온 가와라의 ‘날짜 그림’은 그만의 ‘타임 캡슐’이다. 그림과 함께 스크랩한 신문 중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1969년 7월 20일) 같은 기록적 날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겐 그냥 지나쳤을 날도 다른 이에겐 특별할 수 있다. 결국 사소한 하루란 없는 셈이다. 이 같은 하루 하루는 시장에서도 거래된다. 그것도 비싸게. 최고가는 지난 5월 뉴욕 크리스티에서 420만 달러(약 43억원)에 팔린 ‘1987년 5월 1일’(154.9×226.1㎝)이었다. 그날 작가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평소보다 10배쯤 큰 캔버스에 그렸다는 점이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 뒤잇는 기록인 ‘2005년 8월 1∼3일, 9월 1∼3일’ 6점 세트(약 23억원)와도 크게 차이가 난다.

 오팔카의 경우 2010년 2월 런던 소더비에서 71만3250파운드(약 12억원)에 팔린 ‘1965/1∼∞, DETAIL 5006016∼5023628’ 등 3점 세트가 최고가다. 2008년 온 가와라의 국내 전시를 연 갤러리현대의 도형태 부사장은 “개념미술 작품은 작아 보이지만 크다. 그 작가의 인생이, 역사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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