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 속으로] 경제학은 정치학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장하준(51) 교수가 영국 케임브리지대 마셜 라이브러리에서 창 밖을 내다 보고 있다. 유리에 적혀 있는 글자는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의 원제인 ‘Economics : The User’s Guide.’ [사진 부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496쪽, 1만6800원

좋은 경제학 교과서란 어떤 것일까. 잠깐 다른 나라 이야기부터 하자. 몇 년 전 미국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의 실제 출생지가 케냐이므로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 한동안 계속됐다. 적지 않은 미국인이 이 비상식적인 주장을 사실로 굳게 믿었다고 한다. 증오 때문이었을까. 그 무렵 미국에서는 의료비용 절감 방안을 놓고 논쟁이 치열했다. 미국은 선진국들 중 의료비 지출 비중이 유독 높은 나라다. 공화당에서는 고령층과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정부가 운영 중인 의료보장 프로그램에 시장원리를 도입해 의료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반대편에는 의료의 경우 사과나 옷과 같은 재화와 그 성격이 크게 다르고 수요자가 정확한 판단을 하는 데 필요한 정보 또한 부족하므로, 시장원리보다 정부 규제가 중요하다는 폴 크루그먼이 있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크루그먼의 칼럼은 많은 이들에게 회자했는데, 세계적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미국 특파원이 올린 글이 특히 화제가 됐다. 시장을 의심한 크루그먼의 행동은 오바마의 출생을 의심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도발적 주장 때문이었다. 대중들은 무지몽매해서 시장의 훌륭한 자원배분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럴수록 경제학자라면 시장의 확산이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진리를 설득해야 한다는 게 그의 논지였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최고의 경제학자가 사람들을 계몽하기는커녕 시장을 비판하는 등 ‘사회학자’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의 과도한 정치적 신념이 ‘경제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압도하지 않고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요즘 사람들이 경제학에 관해 품고 있는 일반적 견해이기도 하다. 이런 흐름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높은 『맨큐의 경제학』 같은 교과서에 의해 주도됐다. 그 책은 복잡한 개념을 쉽게 설명해 주고, 현실의 사례도 많이 다룬다.

 그러나 이 현실은 수요공급 원리를 확인하는 데 의의를 두는 가상의 추상적 현실이다. 이 가상의 현실에서 임금 상승은 노동수요를 줄이고 노동공급을 늘림으로써 실업을 키울 수밖에 없는 바, 최저임금제의 실패는 시작 전에 이미 예정된 셈이다. 맨큐의 경제학으로 경제학을 접한 사람들은 진짜 현실의 노동자와 기업주들이 임금의 변화에 어떻게 반응할지, 그 구체적 이유는 무엇일지에 관한 경험적 관심은 무시한 채, 자유시장의 권능을 ‘선험적으로’ 확신하는 ‘작은 맨큐’로 거듭 태어난다. 이 와중에 우리의 경제적 삶은 성장동력 훼손, 비정규직 확대, 양극화와 불평등, 불확실성과 불안으로 고통받는다.

 새로운 대안 경제학 교과서로서 선을 보인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가 유난히 반갑게 다가오는 이유는 경제학을 둘러싼 이러한 암울한 현실 때문이다. 장하준은 엄밀한 수리적 모델을 통해 합리적 선택의 과학을 과시하는 신고전학파가 일종의 지적 사기라며, 모델 대신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적 전개와 경제학의 다양한 분파를 소개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경제학 교과서의 주된 내용은 경제사와 경제학설사, 그리고 경제정책으로 채워져야 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자본주의의 역사를 다룬 3장과 경제학의 역사에서 대표적인 학파들을 소개한 4장 ‘백화제방’이다.

 장하준은 경제학을 ‘하는’ 방법이 아주 다양하다는 것을 독자들이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각별히 신경을 쓰며 고전학파, 마르크스학파, 케인즈학파, 개발주의, 제도학파 등 주요 경제학파들의 핵심적 특징을 솜씨 좋게 소개한다. 특히 각각의 학파가 지녔던 인간과 사회에 관한 기본 가정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이 출현하게 된 경제적 상황은 어떠했으며 어떤 계층의 정치적 이익에 주력했는지 등을 분명히 함으로써, 독자들이 죽은 경제학자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려 한다. 경제학파들에 대한 각별한 강조는 신고전학파 경제학과는 차별화되는 진정한 경제학적 사유방식을 통해 독자들이 스스로 경제학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가 약속하는 ‘경제학적 사유방식’은 경제를 바라보는 분석적이고도 종합적인 사고인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여러 주장의 숨은 전제나 가정들을 분명히 한 가운데, 구체적인 현실을 여러 경제학파들과의 접목을 통해 해명하려는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접근법이다.

 장하준에 따르면,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우리가 좋은 삶을 원한다면 어떤 경제적 상황에서 특정한 도덕적 가치를 구현하고 소기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바람직한 정책이 과연 무엇인지를 놓고 공론장에서 논쟁과 토론을 벌이며 합의를 하는 과정이 반드시 요구된다. 이때 토론과 숙의의 과정을 이끄는 길잡이가 바로 경제학이다.

 독자들이 좋은 삶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책임 있는 시민이 되기를 염원한다면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는 그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터이다. 또한 시장과 정부 사이에서, 개인의 선택과 공공의 가치 사이에서, 인센티브에 대한 존중과 공정을 향한 열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줌으로써 경제학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진정으로 기여하기를 꿈꾸는 이들에게도 이 책의 쓰임새는 클 것이다.

[S BOX] 장하준이 말하는 ‘영화로 배우는 경제학’

영화는 의외로 경제학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1936) 주인공은 조립 라인에서 단조로운 작업을 감당해야 하는 공장 노동자다. 그러나 조립 라인의 속도가 너무 빨라져 따라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미쳐버리고 만다.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벌어지기 시작한 직업의 전문화가 인간의 영혼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것을 예언했다.

 ‘월 스트리트’(1987)는 ‘경영자 자본주의’가 현대식 ‘주주 자본주의’로 대체되는 과정의 초기를 그리고 있다. 1930~70년대 선진국에서는 전문 경영인들이 주주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경제를 주도해나가는 경영자 자본주의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단기 금융 이윤을 좇는 부동(浮動)의 주주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철강노동자 출신의 실업자들이 스트립 댄서로 나서는 ‘풀 몬티’(1997)는 노동과 실업 문제를 다룬다.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영국 철강 산업이 쇠퇴하면 문을 닫은 기업들에서 나온 자본(기계류)과 노동(노동자)은 영국이 상대적으로 강한 산업, 예를 들어 투자은행 부문 같은 곳으로 흡수돼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보유한 기술은 특정 직종에만 유효하기 때문에, 실제 직종의 이동은 쉽지 않다. 그 외에 실직의 사회·경제적 영향을 다룬 영화로는 ‘브래스트 오프’(1996), ‘로저와 나’(1989) 등이 있다.

-『장하준의 Shall We?』(부키)에서 발췌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박종현은

경남과학기술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연세대 경제학과에서 마르크스의 화폐이론과 케인즈의 금융이론을 공부했으며, 국회도서관에서 금융담당 연구관으로 일했다. 저서 『케인즈 & 하이에크』(김영사) 등.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