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껏 산다. 시간의 한점 한점을 핏방울처럼 진하게 산다.” -최인훈 『광장』 중에서
“누워 있는 것이 일이라고 생각하면 돼.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어.”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한동안 말을 잃고 있다가 내가 물었다.
“책은 읽어도 되나요?”
의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골치아픈 건 안 돼. 소설 같은 건 괜찮아.”
마을에 초등학교 선생님이 계셨다. 키가 크고 얼굴이 길어 인상이 마치 학 같은, 그런 분이었다. 방의 네 벽에 붙은 책장에 책이 가득했다. 그 가운데서 내 손에 들어온 책이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었다. 30여 쪽을 읽은 뒤에 나온 한 구절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힘껏 산다. 시간의 한점 한점을 핏방울처럼 진하게 산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벽촌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나로서는 그렇게 살아야 희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 수 없게 되었다. 1962년 고교 2학년 때 결핵에 걸렸기 때문이다.
공기 좋은 데서 지내야 한다, 영양보충을 충분히 해야 한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 의사는 이 세 가지를 주문하면서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이 안정이라고 강조했다. 운동량을 최소화하고 푹 쉬라는 것이었다. 의사는 덧붙였다.
“병을 가벼이 알고 까불면 죽어.”
그 공갈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 시절에 결핵은 죽는 병이었다. 나는 모든 꿈을 접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내 책은 아니지만 빌려 볼 데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광장』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이명준의 고뇌를 하찮거나 아니면 사치스러운 것으로 얕잡아 보았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나의 문제에 비하면, 남이냐 북이냐 하는 이명준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화두였다. 그러나 나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개인의 명제라면 남이냐 북이냐 하는 것은 민족의 명제였다. 개인의 죽음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깨달음 덕분에 나는 소설에 몰입해 갔다.
소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중립국 인도를 택한 이명준은 인도에서 새로운 꿈을 펼쳐가야 한다. 거기서 힘껏 살아야 한다. 보란 듯이 성공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택한 것은 엉뚱했다. 죽음이었다. 소설가 최인훈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다가 맞닥뜨릴 민족의 내일을 암시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마치 나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한동안 그 음울한 암시의 중압에 눌려 지내다가 뜻밖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이 사회에 뭔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되자. 그러기 위해 도전하자. 대학에 가자. 그러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부닥쳐 보자.
나는 서울에 올라와 독서실에 들어갔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마냥 쉬라는 의사의 말이 걸렸다. 이명준이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싸워. 싸워서 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싸우지도 않고 지는 걸 두려워해.
나는 책상 앞에 큼지막하게 써붙였다. ‘힘껏 산다’. 시간의 한점 한점을 핏방울처럼 진하게 산다. ‘수없이 고꾸라져서 수없이 정강이를 벗기더라도 말쑥한 정강이를 가지고 늙느니보다는 낫다’는 그 다음 문장은 이미 마음 깊숙이 꽂혀 있었다.
뒤에 문학과지성사가 낸 『광장』 2판에서 평론가 김현은 1960년이 사회사적으로 학생의 해였다면 소설사적으로는 『광장』의 해였다고 썼다. 그의 평은 『광장』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광장』은 그 이상이었다. 『광장』은 소설사의 울타리를 넘어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물음을 우리 사회에 던졌다. 그 물음은 60년대의 것이지만 지금의 것이기도 하다.
『광장』은 내 개인사적으로 보면 나로 하여금 소년기의 과장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도전적인 청년기로 이행하게 했다. 사적인 광장인 내 마음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적인 광장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광장』 덕분에 실컷 화살을 쏘아댈 큰 광장을 찾았다고나 할까.
소설에서 정 선생이라는 분이 이명준에게 말한다.
“꾸부러진 손가락으로 자네에게 주어진 패를 잔뜩 움켜쥐고 묘지에 들어서는 게 자랑은 아닐세.”
맞는 말이다. 패는 던지라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S BOX] 해양고 나왔지만 탈 배 없어 진로 바꿔
김민환 교수는 목포 해양고 항해과 출신이다. 1960년대 초 한 달 하숙비가 480환(당시 화폐 단위)일 때 650환씩 국비를 받고 학교를 다녔다. 체신고·철도고 등 나라에서 특수 인력 양성 학교를 운영하던 시절이라 2등항해사 자격증을 땄지만 졸업해도 탈 배가 없어 진로를 바꿨다. 64년 11월 독학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한 뒤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2회에 2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수석 입학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1945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고려대 언론대학원장, 한국언론학회 회장을 지냈다. 『일제강점기 언론사 연구』, 장편 소설 『담징』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