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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학생칼럼

현대인의 연애학개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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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서효정
고려대 영문학과 4학년

‘목소리만 들어도 남자친구의 기분을 알 수 있는 눈치 빠른 여자. 우울한 남자친구를 웃게 하는 유머러스한 여자. 분위기에 맞춰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하는 매력까지 겸비한 여자’.

 이런 완벽한 여자가 있다. 요즘 흥행하는 영화 ‘그녀(Her)’의 주인공 시어도어의 여친 사만다다.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는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원치 않는 시어도어에겐 안성맞춤이다. 연인 사이 감정 소모의 원흉인 다툼도 없고, 집착과 질투도 딱 프로그래밍된 수준까지만 한다. 그녀가 필요하지 않을 때 시어도어는 그녀를 ‘꺼놓으면’ 된다. 편리하고 ‘쿨’한 관계다.

 영화를 보다가 이따금씩 시어도어의 모습에 씁쓸함이 밀려온다. 감정 소모에 인색한 우리네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내 경우도 그랬다. 이성 관계에선 누군가를 좋아할수록 자주 싸웠고 상처도 더 크게 받았다. 감정에만 집중하다 더 중요한 걸 놓치기도 했다. 좋아하던 사람이 “수업 같이 듣자”는 한마디에 내 전공도 아닌 경제학 전공수업을 덥석 신청해 학점을 깎아먹었던 뼈아픈 역사도 있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쿨하게 적당히 사랑하는 친구들은 나처럼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고 있었다. 연애도 큰 굴곡 없이 무난해보였다. 상처 받기도, 손해 보기도 싫었던 나는 그들처럼 되려고 노력했다.

 나처럼 감정을 절약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서로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딱 적당히 사랑하려 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쿨함은 시대의 화두이고, 열렬한 사랑은 퀴퀴한 옛이야기처럼 들린다. 우리가 감정을 쏟는 걸 거부하는 이유는 상처와 손해를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사랑 끝에 오는 상처와 감정으로 인해 일상에 지장이 생기지나 않는지 두려움이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더 많이 좋아하는 게 지는 것’이라 믿고, 먼저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졌다.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시인 예이츠는 모드곤이란 아리따운 여성을 20년이나 쫓아다니며 일방적으로 구애했다. 그에겐 슬프고 애달픈 시간이었겠지만, 그 시간은 결국 그와 그의 시를 태어나게 한 양분이 됐다. 내가 잊고 있던 사실이 그것이었다. 대학 4년간 감정을 쏟은 만큼 고달팠다. 그러나 아파 보고 싸워 보고 나니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아낌없이 표현해야 하는 감정과 조금 참았다 표현할 감정을 나름대로 구분 짓게 된 거다. 슬픔과 동시에 기쁨도 남들보다 크게 느껴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덤이다.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힘들었던 만큼 내면은 단단해졌다. 상처도, 힘든 시간도 결국엔 성숙한 우리를 이뤄내는 한 부분이다. 이를 두려워해 사랑을 저울질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

서효정 고려대 영문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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